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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문을 만드는 노동자가 쓴 시집, <쇳밥>
 방화문을 만드는 노동자가 쓴 시집, <쇳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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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 쇠붙이를 깎을 때 떨어지는 자잘한 부스러기를 일컫는 말이다. 쇠를 깎고 나면 선반 위아래로 수북이 쌓이기까지 쇳가루는 일하는 이의 눈을 찌르기도 하고, 살을 파고들기도 하고, 폐에 켜켜이 쌓이기도 한다. 그 쇳가루가 누군가에게는 먹고 살 밥심이 되기에 그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쇳밥' 먹는다고 말한다.

끈적끈적한 기름을 묻혀 가며 일하는 이들은 기름밥을 먹는다 말하고, 책상머리 글쟁이들은 글밥 먹는다고 한다. '쇳밥, 기름밥, 글밥' 같은 말들은 흔히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먹고사는 처지를 속되게 이를 때 쓴다. 그 말 속에는 자조 섞인 읊조림이 섞여 있고,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이 담겨 있다.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 사람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찾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 노동 현장이다. 특별히 육체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이 시대는 노동자들마저 노동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 노동 혐오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문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일수록 적게 받고, 쉽게 일할수록 많은 돈을 받는 기이한 일이 벌여져도 아무도 시비 걸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나는 노동자요!'라고 선언하고 팔뚝질하듯 <쇳밥>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이 나왔다. 제목에서 노동시집이라는 걸 한 번에 알 수 있다. 노동자로 살면서도 정작 노동자로 불리기를 싫어하는 세상인지라 제목만 보고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쓴 시일 거라고 단정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편견이다. <쇳밥>은 하루하루 고되게 반복하는 노동에 서정성과 현실을 담아내어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독자를 울리기도 한다. 

<쇳밥> 책표지 김종필 시집, 도서출판 한티재 펴냄
▲ <쇳밥> 책표지 김종필 시집, 도서출판 한티재 펴냄
ⓒ 도서출판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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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에는 산재와 부당해고, 임금체불과 실업수당, 청년실업, 이주노동자 등 갖가지 사연을 담은 시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단 몇 구절에도 화폭을 펼쳐놓은 것처럼 생생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고,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뜨끈해지기도 하고, 손을 내밀어 함께 하고 싶게도 한다.

<쇳밥>을 펴낸 김종필 시인은 대구성서공단에서 방화문을 만드는 노동자다. '닫힌 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묻고 답하고 있다.

문을 만드는 나는
가끔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합니다
(중략)
세상에 닫힌 문은 없어야 합니다
열리지 않는 문은 문이 아닙니다  –10. 닫힌 문

조선실록에는 1394년 2월 12일 서소문 옹성이 무너지려 하자 감역관을 옹진으로 귀양 보내고 사흘 뒤에는 석장이었던 중을 효수하여 문에 걸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을 허술하게 만들었다고 책임자를 효수까지 했을 정도로 유사 이래, 문은 외부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

안전과 사생활 보호라는 목적을 강화하려면 문은 무겁고 틈이 없어야 했다. 반면 볼 일 때문에 외부로 나갈 때는 가벼워야 하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가 와서 두드릴 때 역시 열릴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이 만드는 방화문은 닫힐 일이 없을 때 가장 안전하다. 만일 방화문이 닫힌다면 불이 났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 닫힌 문은 없어야 합니다' 하는 시인의 말은 현실적이다. 반면 '열리지 않는 문은 문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소통'이 없는 존재는 존재 의미가 없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닫혔다가도 밖에서 두드리면 열려야 문이다. 세상도 마찬가지요, 시인도 마찬가지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소통을 강조한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외침이 공허하다는 걸 선거가 끝나는 순간 확인한다. 문을 여는 일이 위험을 감수하고 불편한 일이라 할지라도 닫힌 문은 없어야 하고, 열리지 않는 문은 문이 아니라는 시인의 고백은 꽉 막힌 세상에 대한 외침이다.

냉혹한 현실과 따스한 사람을 모두 담아낸 시

몸뚱이 믿고 살아가는 육체노동자들이라고 다들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건 아니다. 오히려 고된 노동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점점 쇠약해져 가기도 한다. 시인의 말처럼 그들이 하루를 온전히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밥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니 서럽다가
아프지 말고 살아야지,
다짐을 꾸역꾸역 삼키지만
무엇 하나 죽을 각오로 덤비지 못하는 약골 –14. 약골

약골이라도 일해야 사는 서글픈 세상은 '식은 밥 한 숟가락을 퍼 먹기 위하여 내 속에서 (쇳밥) 한 숟가락을 퍼내는 일'을 해야 한다. 쇳가루 속에서 하루를 견디다 소주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쇳밥 한 봉지 들고' 제 새끼를 불렀던 아버지처럼….

꽃가루 설거지 비 내려 더 부산한 화요일
프레스 발판을 밟을 때마다
쇳밥 한 숟가락이 쏙쏙 쌓이고
해진 철판을 파란 불로 녹여 붙일 때마다
설움의 목구멍이 깊다
식은 밥 한 숟가락을 퍼 먹기 위하여
내 속에서
한 숟가락을 퍼내는 일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새의 마음으로
저물녘이면
쇳밥 한 봉지 들고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비틀거리며
새끼야,
큰소리를 치며
저문 강 건너 집으로 가겠지
끅 끅 끅 메이는 늙은 프레스야
붉은 기름 한 방울 한 방울이 내 마음이다 –35. <쇳밥> 전문


김종필 시인은 '쇳가루도 삼키도록 날마다 마디마디 단련된 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숙련노동자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시인은 물에 푹 젖은 파지처럼 몸이 무거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시인이 일하는 공장엔 "큰돈을 벌겠다고 캄보디아 친정에 아이 둘만 떼 놓고 왔지만 한국에서도 돈 벌기는 사금을 치는 것보다 힘겨운" 여성 이주노동자도 있고, 고향 떠난 쪽방살이 늙은 총각도 있다.

동료들을 바라보는 노동자 시인의 눈빛은 따뜻하다. 나이든 공장 후배가 베트남 아가씨와 결혼했는데, 다 큰 딸애가 있단다. 헤어질 엄두를 못 내는 후배나 그를 위로하는 시인이나 마음 씀씀이만큼은 넉넉하다. 웃고 있지만 울음이 나오고, 슬픈 현실 가운데도 웃을 수 있는 건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바삭 마른 입술을 핥더니
아오자이와 태권도복을 입고 있는
큰딸의 사진을 보여 주며
사람들이 나하고 정말 닮았다고 하네요,
붉어진 얼굴로 어설피 웃는다
그래, 너랑 똑같이 생겼네. -61 베트남 아가씨

시인이 일하는 현장에서 노동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은 현실성이 없다. 노동자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 부당해고를 당하고, 실업자 신세가 되어 실업수당을 받을 땐, 시민을 섬기라고 있는 공무원들조차 노동자를 구차하게 만들어 버린다.

차라리 똥구덩이에 빠지는 일을 할 때가 행복한 것을, 내 것을 돌려받는 슬픔이 더 독하다. - 75. 실업수당


옛 어른들은 일하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노래에서 흥겨움을 찾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우렁찬 결의와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바라기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들을수록 듣기 좋은 소리가 되어 귀에 맴돌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쇳밥>은 슬픈 단어가 되어 버린 노동이 제대로 대접받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밤 풍경은 빛이 들어가야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시인은 어두운 노동 현장에 들어간 빛이다. 시인이 살피지 않았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노동현장이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쇳밥>이란 이름으로.


쇳밥

김종필 지음, 한티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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