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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55분. 그들의 말소리가 멀리부터 들린다. 순진한 얼굴의 재빠른 그들이 들이닥치는 건 이제 시간 문제. 매일 마음을 강하게 먹지만, 오늘도 쉽지 않을 듯. 숨을 고른다. 10,9,8,7,6,5,4,3,2,1 땡. 드디어 도착.

"아저씨! 수수깡 주세요."
"색상지 있어요?"
"그거 말고, 저거 주세요."
"한문 노트 어디 있어요?"
"색연필 주세요."
"실내화 230 있어요?"
"수정테이프 주세요."
"이거 어제 산 건데 바꾸면 안 돼요?"

'주세요'와 '있어요?'의 공습. 각종 준비물을 사 가는 초딩의 기세는 놀랍다. 이에 질세라 중딩도 공격에 가담한다. 그들의 공격에 맞서 나는 한 손으로는 물건을 건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돈을 받고 잔돈을 건넨다. 또다시 한 손으로는 물건의 위치를 알리고, 한 손으로는 다른 물건의 위치를 알린다. 힌두교의 손 많은 어떤 신처럼 손이 한두 개라도 더 있으면 좋으련만...

8시 30분. 30분의 시간이 마치 3분처럼 후딱 지나갔다. 순간 고요. 곳곳은 어질러졌고, 카운터 위는 동전들과 꼬깃꼬깃한 지폐들이 패잔병처럼 널브러져 있다. 나는 수백 방 잽을 맞은 권투선수처럼 비틀거린다. 여기는 문구점. 나는 문구점 사장이다. 아니 더 많이 불리는 호칭은 '아저씨'. 문구점을 한 지도 4년이 흘렀다.

문구점을 시작한 지 4년이 흘렀다

 좁고 복잡한 카운터이지만 글을 쓰는 공간이 된다
 좁고 복잡한 카운터이지만 글을 쓰는 공간이 된다
ⓒ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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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나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바쁘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일주일이 지났고, 한 달이 지났고, 1년이 지났고, 4년이 된 것이다. 세상에 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동안 부침이 심했다.

가게에선 거의 앉아 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일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장난감이나 준비물을 사다 진열하고, 그것들을 파면 되는 것이니까. 다른 직종에 비해 재고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다양한 손님을 맞다 보니, 그중에는 친절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위 '진상'도 많았다. 동전을 마구 던지는 철부지 아이부터 가게 안의 장난감 곽을 다 뜯어보고 사지 않고 나가는 아주머니, 반말을 마구 하시는 어르신까지.

결국 몇 개월 동안 정신과 진료도 받아야만 했고, 술담배를 하지 않는데도 혈압이 높아져 혈압약을 먹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친절이 생명인 서비스업에서 나는 무뚝뚝하고 뾰로통한 아저씨로 아이들을 대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달고 살았다.

'휴. 정말 문구점 하기 싫다. 빨리 다른 일을 하고 싶다.'

실제로 '다른 일을 해 볼까' 기웃거렸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에 지원서를 넣기도 했다. 경력이 전무한 40대를 뽑아줄 곳은 당연히 없었다. 한숨과 불평은 점점 늘어났다. 같이 문구점을 하는 아내와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가는 아들 보기에 부끄럽기만 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심한 스트레스... 다시 글을 쓰자

책을 읽다가 이 부분이 눈에 밟혔다. 자꾸 되뇌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하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중에서>

망망대해에 떨어진 주인공 파이. 게다가 그의 곁엔 언제 자기를 잡아먹을지 모르는 호랑이가 있다. 그런 파이가 선택한 것은 '당장 하는 일'이었다.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파이는 호루라기로 호랑이를 길들이고, 낚시를 해서 먹을 것을 구하고, 물을 구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결국 파이는 생존했다.

어쩌면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큰 것이 아닐지 모른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지만 말고,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는 말인 '소확행(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가는 건 아닐까.

올해부터는 조금씩 삶에 변화가 생겼다. 늘 혼자 지냈는데, 이젠 지인들과 일요일 저녁에 배드민턴을 친다. 실력은 하나도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국가대표의 마음으로 코트를 누빈다. 현충일에는 처음으로 낚시도 다녀왔다. 손을 놓았던 책도 다시 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오마이뉴스>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처음 시작할 때는 문구점의 일을 글로 쓰는 것이 재미있었고, 나름 독자들의 호응도 있었다. 그렇지만 매번 똑같은 일을 하느라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고, 내 글의 요지와 상관없는 악플에 신경도 쓰였다. 그러다보니 점점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이렇게 4년이 흘렀다.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거창한 내용은 없다. 그저 내 마음의 변화, 문구점의 소소한 일을 적을 뿐이다. 그게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되겠기에.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blog.naver.com/clearoad)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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