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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慣性)이란 사전적 의미로 '물체가 밖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쉽게 말해, 물체가 가만히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관성이 작용하는 힘은 우리 실생활의 다양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동차가 갑자기 출발하거나 정지할 때, 날아오는 야구공을 잡을 때도 느낄 수 있다. 재밌는 사실은 이러한 물리학 뉴턴의 운동법칙 중 제1법칙인 관성의 법칙이 정부의 정책을 포함한 제도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한번 도입되어 정착된 제도가 처음 목표로 한 목적을 달성했거나 효과가 미비하고, 실패했을 때에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제도의 관성'이다.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수많은 정책 중에는 제도의 관성에 의해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정책들이 부지기수다. 여기서 의심되는 정책을 모두 거론할 수 없는 관계로 오래전 도입된 '책임운영기관제도'를 사례로 살펴보자.

관련 법률에 따르면 책임운영기관은 '정부가 수행하는 사무 중 공공성(公共性)을 유지하면서도 경쟁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전문성이 있어 성과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 사무에 대하여 책임운영기관의 장에게 행정 및 재정상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운영 성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행정기관'을 말한다.

개념 설명만으로는 금방 감이 오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집행·서비스 업무를 다루고, 인사·재정 등의 자율성을 가진 기관을 말한다. 근무자 신분은 공무원이다. 경찰병원, 국립중앙극장, 특허청 등 51개 기관이 우리나라 책임운영기관에 해당한다.

법률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책임운영기관, 무엇이 문제인가. 첫 번째, 도입 당시 제도에 대한 깊은 고민과 정책의 적절성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부족했다. 이 제도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기존의 정부조직에 시장운영원리를 도입하려는 개혁차원에서 추진되었다. 당시 외부 지원이 절실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국제통화기금이 강요하는 공공부문 감축논리와 신공공관리론의 민간관리기법을 기반으로 한 책임운영기관제도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 운영되고 있는 제도가 우리의 조직 문화와 환경, 권력 구조하에서 적절한지 고민하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제도의 관성을 이탈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도입된 이후 법에 명시된 행정 및 재정상의 자율성을 제대로 부여받은 책임운영기관은 아마 없을 것이다. 책임운영기관은 행정안전부 소관이고, 예산과 관련된 사항은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하고 있다. 중앙부처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힘이 센 두 기관을 상대하다 보니 책임운영기관이 자율적,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어렵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실제로 자율성 측면은 책임운영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가장 큰 불만 사항이다.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가 손에 쥔 권한(조직과 예산)을 놓을 리 만무하다. 제도의 관성이 작동되는 과정이다.

이외에도 책임운영기관을 설치할 때 대상이 되는 기관의 수요와 필요성에 의한 추진보다는 상위 기관의 정치적 이유나 조직의 확대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러다 보니 기관 설치의 기준도 일관성이 부족하고, 당초 제도 도입의 취지와 다른 기관 운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상위 기관에서 책임운영기관을 통제할 목적으로 성과평가가 오용되고 있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책임운영기관에 근무하거나 관련된 부서 구성원이 아니면 이 제도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 이 제도가 가진 문제가 일반 국민에게 직접적인 큰 피해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정부 정책을 연구하거나 제도 개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문제를 지적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책임운영기관제도는 2000년에 도입된 이후 현재까지 지속해서 몸집을 불려왔다. 제도가 가진 관성의 힘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관성의 법칙에서는 보통 질량이 클수록 물체의 관성이 크다고 한다. 현재 책임운영기관의 규모가 더욱 우려스러운 점이기도 하다. 2000년 10개에서 현재 51개로 증가한 책임운영기관이 앞으로 어떻게 그 모양을 변신할지 알 수 없다. 제도의 관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큰 충격이나 사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책임운영기관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을 그대로 안고, 제도의 관성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태그:#책임운영기관, #제도의 관성, #국가공무원노동조합, #기관의 자율성, #정책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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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소장으로 일했습니다. 정부와 사회 이슈, 사람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 많은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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