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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26총선은 여소야대라는 획기적인 정치환경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지난 87년 대선에서 분열됐던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양대 야당정치지도자가 여전히 일정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한 지지였기 때문에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지역 분할 정치의 폐해를 낳는 것이기도 했다. 야당 정치는 그렇다고 치고, 민청련에게 4.26총선은 어떠한 의미를 남겼을까.

13대총선 결과 제1야당이 확정되자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13대총선 결과 제1야당이 확정되자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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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 없는 승리?

민청련은 4.26 총선에 대해 '반민정당 투쟁'을 방침으로 삼았다. 비록 민청련 출신 중 일부가 평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일견 대선 때의 '김대중 비지' 노선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공식적인 투쟁방침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일 없이 반민정당 투쟁에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평민당 입당파, 한겨레민주당, 민중의당 등 제도권 정치에 진입을 시도한 운동세력 어느 쪽에 대해서도 지지 여부를 표명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민청련이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으로 나왔다.

우선 평민당에는 운동 세력 전반에서 가장 많이 입당했고 그만큼 많은 국회의원 당선자를 냈다. 민청련 출신은 아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정상용, [꼬방동네 사람들]의 저자로 빈민운동가인 이철용, 시집 [겨울공화국]을 낸 저항시인 양성우 등이 국회에 입성했다. 민청련 출신으로 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이해찬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 87년 대선에서 '후단'의 입장을 견지했던 유인태, 제정구, 원혜영 등이 주축이 돼 창당한 한겨레민주당은 겨우 1석을 얻어 간신히 연명에 성공하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 1석도 평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이므로 사실상 전패와 다름없는 결과였다. 양김의 지역정치를 극복하고자 한 '후단'의 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

87년 대선 때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돼서 창당한 '민중의 당'은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16개 지역구에 출마자를 냈다. 민청련 출신 진영효는 동대문구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고 출마한 지역구의 평균득표율은 겨우 4%에 그쳤다. 전국 득표율 0.3%로 법률에 의해 곧바로 정당 등록이 취소됐다. 그들이 주장한 '민중의 정치 진출'은 싹도 틔지 못하고 좌절됐다.

결국 운동권의 제도정치권 진출 시도에서 평민당 입당파만 성공한 셈이 됐다. 그리고 이는 민청련이 대선에 이어 김대중 비지를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민청련 지도부는 이 점을 우려했다. 총선이라는 정치 일정에 상관없이 운동세력의 단결을 1차적 과제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청련은 총선의 파격적 결과가 발표된 뒤 곧바로 민청련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핵심 대목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평민당의 제1야당 부상을 지난 대통령 선거 시기의 '김대중 비판적지지'로 연결시켜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무리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아울러 한겨레민주당, 민중의 당 등 이번 총선에서 의도한 바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동지들에게도 '조소의 눈빛'을 보내는 것과 같은 소아병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13대 4.26 총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힌 민청련 성명서
 13대 4.26 총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힌 민청련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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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서 맞은 5월 투쟁

총선에 이어 해마다 맞는 5월 투쟁의 계절이 돌아왔다. 1988년 5월의 정세와 환경은 예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우선 87년 직선제 개헌과 그에 따른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뒤였으므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적어도 헌법적 권리로서 보장되는 여건이 마련됐다. 민청련 지도부는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군부독재 세력은 여전히 권력을 잡게 됐지만, 민중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적 권리들을 그들이라고 함부로 훼손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88년 5월 투쟁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철저하게 통제돼 온 광주의 진실을 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광주 학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로 정리했다.

민청련은 이미 4.26총선 때부터 광주의 진상을 담은 화보집을 만들어 유세장에서 청중들에게 배포했다. 광주 항쟁 당시의 끔찍한 사진들을 편집해줄 '간 큰' 출판사가 없어서 당시 신혼 초이던 김성환 의장의 하남시 단칸 신혼집에 십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밤을 새워 편집 작업을 했다.

5월 투쟁 기간 동안에는 인쇄된 화보집 이외에 외신이 촬영한 당시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해 상영하기로 했다. 민청련은 지역지부로 편재돼 있었기 때문에 각 지부에서 대학이나 교회에 장소를 섭외해 '광주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동민청의 경우 성수 공단 지역에서 이미 삼성제약 파업, 대한광학 노조탄압과 관련해 아남전자 항의 방문 등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그 결과 지역에서 지역 단체로서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었다. 동민청은 그 힘을 토대로 성수 교회를 빌려 하루에 2차례 씩 1주일 동안 상영회를 열었다. 여기에 연인원 2500여 명이 관람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1988년 4월, 동민청 회원들이 대한광학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투쟁에 나서고 있다
 1988년 4월, 동민청 회원들이 대한광학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투쟁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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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광주 영화 상영회'는 남민청과 북민청에서도 진행됐다. 남민청의 경우, 지역 노동운동과의 연계에 활발했던 동민청과는 약간 다르게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에 대한 교육사업에 열중했다. 당시 운동권에서 활발했던 청년운동론 논의에 대해 가닥을 정리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이 더해졌다. 남민청의 교육사업이 커지자 지부 차원이 아닌 민청련 전체 차원의 교육기관이라는 성격을 띨 정도가 됐다.     

북민청은 애초 설립 의도대로 주로 사무직 직장 청년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나중에 그러한 성과를 토대로 북민청은 직장청년회로 전환된다.

민청련의 지역지부 건설 사업은 이미 3월 말에 큰 성과를 냈었다. 바로 안양민청련의 창립이었다. 안양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당시 투옥 중이던 대선배 김병곤의 지지와 지원 아래 서울 이외 지역으로는 최초의 지부를 결성한 것이다. 초대 위원장은 전에 여성부장을 지냈던 임태숙이 맡았다. 

안민청은 주로 공단 지역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는데, 안민청은 노동운동과 함께 정치투쟁을 펼칠 단위로서 주목을 받았다.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안양민청련 창립대회 공고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안양민청련 창립대회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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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투쟁에 충격 던진 조성만 열사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성당 마당에서는 곧 5.18추모 마라톤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순간, 문화관 옥상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서울대 학생으로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하던 조성만. 그는 옥상에서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해 평화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제 몰아내고, 광주학살 진상을 밝혀라!"라고 외친 뒤 할복을 하고 투신, 사망했다.

조성만의 죽음은 모든 운동 진영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87년 국민운동본부에 버금가는 대규모 장례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현 경희궁)에서 양 김씨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이 참여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망월동 묘지에 안장하기로 해서 운구가 광주에 도착하자 광주 시민 30만 명이 운집해 조성만의 뜻을 기렸다.

현재 서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그의 추모비에는 앞머리에 "조국통일열사"라는 호칭이 새겨져 있다. 조성만의 죽음은 운동 세력에게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넘어 '통일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 것이었다. 이른바 '민족해방'을 뜻하는 NL이라는 운동이념이 한 학생의 죽음을 통해 전면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할복하고 투신하는 순간의 조성만 모습과 그의 학생증 및 주민등록증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할복하고 투신하는 순간의 조성만 모습과 그의 학생증 및 주민등록증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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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학련과 자민투

NL은 88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학생운동 쪽에서 몇 년 전부터 그 싹이 나고 자라서 이미 잎이 무성한 나무가 돼 있었다.

아마도 NL운동의 싹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1986년 4월 28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정권이 학생들에게 안보의식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하던 '전방입소훈련'을 거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교내에서의 농성이 불허되자 신림동 사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던 그날, 신림 사거리의 한 건물 옥상에 김세진과 이재호가 나타났다.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던 둘은 체포를 위해 다가오는 경찰 앞에서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해 사망했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와 함께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이었다.

사실 광주항쟁 이후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 돼 왔다. 전두환 일파가 공수부대를 광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작전권'을 가진 미군의 허락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과 서울 등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미국의 책임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투쟁 당시 학생들은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죄하라"고 외쳤지만, 동시에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6.25전쟁 이후 남한 운동권에서 '반미'는 거의 금기어에 가까웠다.

그런데 김세진과 이재호는 '반미'를 넘어 "양키 고 홈"까지 외친 것이다. 이즈음 학생들 사이에 이러한 반미의 이념을 전파한 문건이 있었다. '강철서신'이라는 필명으로 나온 지하 팜플렛들이었다. 나중에 글쓴이로 밝혀진 김영환은 이들 팜플렛을 통해 운동의 방향을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반미투쟁'으로 전환해야 하며 반미투쟁의 근거지로서 북한을 새롭게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말하자면 북한의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남한 운동의 지침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김영환은 이러한 구상 아래 서울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지하단체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그것의 외적인 투쟁기구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약칭 자민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NL 계열의 지하단체와 투쟁 기구는 연세대와 고려대를 거쳐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됐다.

조성만의 투신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민청련 지도부도 이러한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민청련의 NL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나.

구국학생연맹의 지도 아래 결성된 ‘자민투’의 첫 선언문과 김영환의 강철서신을 나중에 엮어낸 책의 표지
 구국학생연맹의 지도 아래 결성된 ‘자민투’의 첫 선언문과 김영환의 강철서신을 나중에 엮어낸 책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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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NL을 어떻게 보았나

김성환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운동이 북한과 연계될 경우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위험하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에 엮이게 되고, 운동권이 북한에 연계됐다는 정권의 대대적인 선전으로 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유리되는 사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동권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폭압 정권 아래서 늘 탄압을 받아왔으므로 탄압 자체를 빌미로 어떤 논의에 대해 기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제는 NL의 논리 그 자체의 타당성이었다.

민청련 지도부는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바라보는 NL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운동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하는 데 대해 반대했다. 

당시 민청련은 한국 사회는 비록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국가지본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지만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않은 미국의 신식민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국 민중이 미국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항의하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서 인정했다.

그런데 이때 NL 학생운동이 당면한 88올림픽에 대해 남북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나왔다. 조성만이 죽음으로 외친 '남북공동올림픽'. 이에 대해 민청련은 태도를 정해야 했다.    


태그:#민청련, #13대총선, #안민청, #조성만, #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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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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