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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으로 왼쪽 책상에서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으로 왼쪽 책상에서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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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아닌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판문점 정전회담장 동쪽 출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실무자가 입장하여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 그와 동시에 서쪽 출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들어와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었다. 정전회담장은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 회담장에는 북쪽으로 세 개의 탁자를 나란히 배치해뒀다. 세 개의 탁자 중 가운데 탁자를 완충 경계지역으로, 양쪽 탁자에 앉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대표들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 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을 했다. 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이날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기 서른여섯 번씩 서명을 했다. 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가 하늘에서 무력시위라도 하듯, 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양측 대표는 10여 분간 서명을 끝냈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은 회담장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전투가 잠시 머무는 '정전'이었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소련이 정전협정을 제의한 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 회담 끝에 이뤄졌다. 이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기자단도 유엔군 측 기자는 100명 정도였고, 일본인 기자도 10명 있었는데, 한국인 기자는 단 2명뿐이었다. 한국의 운명이 한국인 참여 없이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1951. 9. 개성, 초기의 정전 회담장이었던 한옥 ‘봉래장(鳳來莊)’이다. 이 장소는 그해 10월 24일까지 사용되다가 다음날부터 유엔군 측 요구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1951. 9. 개성, 초기의 정전 회담장이었던 한옥 ‘봉래장(鳳來莊)’이다. 이 장소는 그해 10월 24일까지 사용되다가 다음날부터 유엔군 측 요구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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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그날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정전협정문에는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 행위를 중지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유엔군 전폭기들은 북한의 비행장과 철로들을 폭격했고, 유엔군 해군 전함들은 동해바다에서 원산항 쪽으로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정전 직전 최후 순간까지 서로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

전쟁에서 교전국간 페어플레이나 자비를 바랄 순 없지만, 한국전쟁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 정전협상일까지 이 나라 국민들의 생명이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국전쟁은 그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참으로 아주 더티(Dirty, 더러운)한 전쟁으로 세계전사에 기록되고 있다.

1953. 7. 27. 22:00,  그제야 정전협정으로 새로이 만들어진 155마일 DMZ(군사분계선, 휴전선)에 비로소 총성이 멎었다. 3년 1개월 남짓 1129일간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양측이 서로 승자라고 우기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 양측 사상자는 민간인 포함 500만 명가량이었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전쟁 전 일직선 북위 38도선 대신에 전쟁 후 구불구불한 곡선의 군사분계선으로, 또 다른 단장의, 원한과 통곡의 휴전선을 남겼다.

그 군사분계선 - 휴전선은 65년이 지난 2018년 7월 1일 현재까지도 견고한 철책선으로 한반도 허리를 두 토막으로 자르고 있다. 누가 이 철책선을 걷을 것인가?

(* 다음 회는 '연재를 끝내면서'라는 제목으로 한 회만 더 이어집니다.)

1951. 7. 15. 개성, 정전회담장에서 기자들이 열띤 취재를 벌이고 있다.
 1951. 7. 15. 개성, 정전회담장에서 기자들이 열띤 취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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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7. 16. 개성, 정전회담장의 북측 대표. 왼쪽부터 중국군 대표 세팡(謝芳), 덩화(鄧華), 북한군 남일 대장,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1951. 7. 16. 개성, 정전회담장의 북측 대표. 왼쪽부터 중국군 대표 세팡(謝芳), 덩화(鄧華), 북한군 남일 대장,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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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5. 14 북한 측과 유엔군 측 정전회담 대표가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1952. 5. 14 북한 측과 유엔군 측 정전회담 대표가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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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7. 9. 시카고 일리노이 주, 한국전쟁 정전을 대통령 선거 공약에 내세운 아이젠하워 후보가 대통령 선거전에 앞서고 있다.
 1952. 7. 9. 시카고 일리노이 주, 한국전쟁 정전을 대통령 선거 공약에 내세운 아이젠하워 후보가 대통령 선거전에 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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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9. 18.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 전경.
 1952. 9. 18.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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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4. 6. 판문점, 북측 대표자들이 정전회담장을 벗어나고 있다.
 1953. 4. 6. 판문점, 북측 대표자들이 정전회담장을 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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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4. 11. 유엔군 측 대표 미 해군 다니엘 제독이 부상자 환자 포로 교환 합의문을 보이면서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있다.
 1953. 4. 11. 유엔군 측 대표 미 해군 다니엘 제독이 부상자 환자 포로 교환 합의문을 보이면서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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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6. 8. 정전회담장을 나오는 북한군 측 남일과 이상조 대표.
 1953. 6. 8. 정전회담장을 나오는 북한군 측 남일과 이상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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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7. 7. 판문점, 유엔군 측 연락장교
 1953. 7. 7. 판문점, 유엔군 측 연락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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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7. 25.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장
 1953. 7. 25.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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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7. 29. 미 해병대 병사들이 진지에서 정전협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1953. 7. 29. 미 해병대 병사들이 진지에서 정전협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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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9. 21. 판문점 정전회담장의 중립국 측 대표들
 1953. 9. 21. 판문점 정전회담장의 중립국 측 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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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휴전선 철책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휴전선 철책
ⓒ 엄상빈(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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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기에 수록된 사진 이미지들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박도 엮음 <한국전쟁 ‧ Ⅱ>에 수록돼 있습니다.



태그:#정전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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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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