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심리전문가들에 의하면 아동기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틀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인과 같은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순탄하지 못했던 성장기에 주목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어떤 아동기를 보냈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달라짐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아동기에 지속적인 폭력을 당한다면? 그것이 믿을 만한 어른에 의한 성추행이라면? 사과나 마땅한 피해 보상은커녕 도리어 2차 피해까지 당하게 된다면? 필요 이상으로 들춰져 낱낱이 까발려진다거나, 흥밋거리가 되는 등처럼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게 한다면? <서울 사는 외계인들>(자음과 모음 펴냄)의 주인공 윤사우의 이야기다.

<서울 사는 외계인들> 책표지.
 <서울 사는 외계인들> 책표지.
ⓒ 자음과 모음

관련사진보기

사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한다. 성추행을 당하고서야 친구 인영이가 선생님이 부르면 절대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도 모르고 걸핏하면 선생님이 부르는 등으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인영이를 부러워하기까지 했던 사우였다.

더 놀라운 것은 담임선생님에게 여러 아이들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다는 것.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쉬쉬 하며 덮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키워 왔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이나 학교 측에서 어떤 처벌을 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가해자 선생님이 권력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엄연한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말이다.

소설은 성추행 가해자 처벌을 위해 인영이 부모와 함께 백방으로 뛰던 사우 엄마가 어느 날 느닷없이 죽은 후 아버지에게 버려지다시피 한 채 음지에서 홀로 자란 열여덟 살 사우가 민들레씨 집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로 눈은 물론 얼굴 대부분을 가려버린 것만으로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사우는 이사 오자마자 책을 찢어 창문에 덕지덕지 발라 햇빛을 차단해버린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는 등과 같은 심상치 않은 모습들을 보인다. 이에 사우 또래의 민들레씨 딸 미미가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니 내보내자"고 재촉하기까지 한다.

"(…)결국 인영이는 그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날마다 아이들이 놀려대니까 견딜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전학은 갔지만, 그 학교도 인영이를 보호해 주지 못했어요. 전학 간지 1주일 만에 그 소문이 아이들 입과 귀를 통해 퍼져 버렸어요. 이번에도 선생님을 통해서 어느 학부모에게 그 비밀이 전해졌고, 그 학부모가 자기 아들한테 말을 한 것이죠. 인영이는 너무도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 걱정 말라는 말만 되풀이 했죠.

(…)인영이의 비밀을 알아버린 아이들은 날이 갈수록 짓궂게 변했어요. 날마다 인영이한테 와서 왜 성추행을 당한 것 같냐, 그때 기분이 어땠냐, 경찰서에서 조사 받을 때 마음이 어땠냐, 그 선생님이 동성애자였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추행을 당했냐고 물어댔지요. 인영이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어요. 그걸 어떻게 대꾸하겠어요. 그런 기억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요(…) 그놈 패거리가 인영이를 가만 두지 않았어요.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몰래 인영이 고추를 핸드폰으로 찍으려고 했어요. 그리고는 인영이의 고추를 만지려고 하자 인영이가 달아나려고 했어요. 강구가 인영이를 넘어 뜨렸어요…." (75~76)


사우는 얼핏 누가 봐도 시한폭탄처럼 위험천만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민들레씨는 좀체 곁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사우에게 차츰 차츰 다가가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마음속 이야기까지 나누게 된다. 이런 민들레씨에게 사우가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한 유일한 친구"라며 여러 번에 걸쳐 들려준 인영이 이야기는 실은 사우 자신의 이야기다.

애초 싸울 생각이 없었던 인영이, 아니 사우는 화장실로 끌려가 강구 패거리들에게 일방적인 집단구타를 당한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리고 3일이나 입원한다. 이런 사우에게 학교 측이 내린 벌칙은 반성문을 써서 대자보에 붙이라는 것.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것. 그런데 이것으로도 모자라 1주일간의 봉사활동까지 시키고 만다. "네 잘못도 크다"면서.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결국 자퇴를 하고마는 사우는 스스로를 '세상에 버려진 외계인, 지구에 잘못 온 외계인, 어쩌면 그래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자책하고 불안해하며 세상(사람들)과 단절하고 만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소년은 그렇게 두 번 씩이나 세상에 버려지고 만다.

사우는 이 이야기 외에 성추행과 성추행 그 후 자신이 겪은 것들을 친구 인영이 이야기인양 이름만 바꿔가며 여러 차례에 걸쳐 민들레씨에게 들려준다. 자신과 가장 친했으나 가해자 처벌을 위한 법정 싸움을 하던 중 엄마가 죽는 바람에 스스로 포기하게 되고 그로 혼자 외로운 법정 싸움을 해야만 했던, 그럼에도 상처만 남은 인영이가 겪은 것들과 함께.

이 부분을 비롯해 사우나 인영이가 겪은 것들을 읽으며 솔직히 욱~! 화가 치밀었다. 학교 측의 부적절한 처사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우나 인영이가 힘 깨나 쓰는 집 아이들이었어도 학교가 그랬을까? 아마도 이 부분을 읽으며 나처럼 뉴스나 드라마 등을 통해 이미 익숙한 우리 사회의 씁쓸한 현실과 같아도 너무 같다고 생각하며 씁쓸해 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수사 과정에 흥밋거리가 된다거나, 성폭행 당한 것이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몰아가기도 하는, 어떤 이유로 집단 따돌림과 폭행을 당해왔던 아이가 어른들의 무관심과 학교의 부적절한 조치 등으로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그런 현실들과 너무도 닮아서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만이 아니다. 특히 성추행만으로 버거운데, 초등학교 5학년생으로 법정에 여러 차례 서야만 했던 인영이 이야기는 화가 넘쳐 슬프게까지 와 닿는다.

민들레씨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나 세상(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것들이 여전히 많은 데다가, 사람관계에 미숙한 사우는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진구와 마주친다. 다시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막 간신히 일어나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진구는 "인터넷에 성추행 당한 너에 대해 까발리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조작한) 알몸 사진과, 포르노 동영상을 유포 하겠다. 교수인 너희 아버지도 그런 사진으로 매장 당하게 만들겠다. 50대 민들레씨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폭로 하겠다"고 협박하며 사우로서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한다. 그래서 결국 사우는...

사우에 대한 측은함 때문일까. 진구와 관련된 부분들은 '민들레씨에게 빨리 도와달라고 해!' 이러다가 욱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면 어째. 이제라도 제대로 걸어가야 하는데', 조바심 나게 했다. 소설 속 이야기란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다.

우여곡절을 겪고 겪지만 사우는 결국 홀로서기를 한다. 이 책을 누구든 읽어볼 책으로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른들의 그릇된 욕망과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 한 아이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느낄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우와 민들레씨의 관계 맺기, 그 과정이 감동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어떤 관계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단다.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관계를 위한 어떤 노력 등이 번거롭거나 싫다는 것. 그래서 차라리 혼자가 속 편하다는 것. 사실 친구가 없어도 아무런 아쉬움이나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관계 맺기를 스스로 원하지 않기도 하고, 관계 맺기에 서툴러서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든 결국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관계 맺기가 더욱 어려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씁쓸하고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청소년들이 많아진다면?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민들레씨의 집. 민들레씨는 그 집을 개신교들과 우후죽순 들어서는 아파트와 빌딩들로부터 지켜낸다고 세상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된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을 등지지 않고 상처투성이의 사우를 품어 세상으로 걸어가게 하는 민들레씨의 관계 맺기는 감동스럽다. 따뜻한 여운으로 남을 정도로.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기에 서툴다거나, 내가 가진 아픔 때문에, 다시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입을까봐 누군가와 선뜻 마음을 나누기 힘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청소년소설이라 더욱 권한다. 적어도 소설 속 어른들처럼 어리석은 어른들은 되지 말기를, 오늘의 어른들보다 건강한 장차의 어른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덧붙이는 글 | <서울 사는 외계인들>(이상권) | 자음과모음 | 2018-03-22 ㅣ정가 13,000원



서울 사는 외계인들

이상권 지음, 자음과모음(2018)


태그:#성추행(성폭력), #스쿨투(미투), #아동폭력, #이상권, #청소년문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