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후면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내가 사는 곳의 일꾼을 뽑는 행사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누구를 무슨 기준으로 뽑아야 할까? 아무도 알려주지 않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은 하는데 당장 미디어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모습만 보면 정치에 관심을 갖기가 참 어렵다.

여기, 정치와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있다. 사실 정치를 다루는 영화들은 보통 '우리가 정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보다 자극적인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참여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허무주의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들만의 리그만을 보여주고 끝날 따름.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정치 시스템에 대해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는 미국이 정치 영화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보는 작업은 꽤 의미 있는 접근이라고 본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지 않는 정치인의 민낯은 어떠한가'를 이야기하는 미국의 정치 영화를 참고해볼 때다.

1. <프로스트 VS 닉슨> (2008)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의 한 장면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소위 '촛불혁명'이라는 것을 겪었던 내 입장에서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닉슨은 1972년 재선을 노리고 상대 당이었던 민주당의 전국위원회를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백악관은 연루설을 부인했지만 결국 닉슨이 직접 CIA 국장에게 FBI의 조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측근들과 사건에 대해 논의하는 테이프가 공개되어 결국 닉슨은 사임한다.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던 이 일은 할리우드에서 두고두고 소재로 쓰였다. 민주주의와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닉슨과 워터게이트를 다루는 영화는 수없이 많다. 그 중 2008년 개봉작 <프로스트 VS 닉슨>은 사임한 닉슨이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위해 전국적인 인터뷰에 응하는 실제 사건을 기반에 둔 영화다.

한물 간 토크쇼 진행자인 프로스트(마이클 쉰 분)는 닉슨(프랑크 랑겔라 분)의 사임 생방송의 압도적인 시청률을 보고 뉴욕 방송국으로 복귀할 생각에 닉슨에게 인터뷰를 제의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미디어를 이용하려는 두 남자의 설전, 동료 프로듀서가 "닉슨에게서 (그의 잘못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라고 반문하지만 프로스트에겐 그것은 명분일 뿐, 목적은 흥행이었다.

프로스트가 설명하듯, 비록 쫓겨나듯이 물러났지만 닉슨은 거물급 정치인이었고 "상당히 교활하고 노련한" 인물이었다. 인터뷰 초반 그의 과오를 걸고 넘어지려는 프로스트의 질문에 닉슨은 전임자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도리어 그것이 자신의 유능함 혹은 정교한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임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프로스트에게 한 방 먹인다. 물론 프로스트 역시 계속 닉슨에게 불리한 질문을 던지면서 인터뷰를 빙자한 두 사람간 기싸움이 영화 내내 펼쳐진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닉슨의 교묘함은 그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봐도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을 우롱한 자가 뻔뻔하게도 미디어를 통해 또 다시 여론을 휘어잡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할리우드가 워터게이트를 성찰의 계기로 삼는 것을 보면서 '결국 제대로 된 정치인이란 무엇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2. <맨 오브 더 이어>(2006)

 영화 <맨 오브 더 이어>의 한 장면

영화 <맨 오브 더 이어>의 한 장면 ⓒ 유니버셜 픽쳐스


"당신이 대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유권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프로스트 vs 닉슨>처럼 <맨 오브 더 이어>의 주인공도 예능 진행자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 톰 돕스(로빈 윌리엄스 분)는 신랄한 정치 풍자로 인기를 끌고 있는 토크쇼를 맡고 있다. 한 청중이 그에게 "당신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을 할 정도로, 정치에 실망한 시민들은 극중에서 돕스의 만담에 공감한다.

이후 그 질문이 발단이 되어 돕스 매니저에겐 '돕스를 대통령 후보로 세우자'는 메일이 8백만 통이나 온다. 돕스에 대한 관심이 인터넷의 발달과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돕스가 정말로 미국 대통령직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이후 13개 주에서 후보자 명단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그 당시 새로운 투표 시스템이 도입이 되었는데, 한 프로그래머가 선거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다가 시스템의 결함을 발견하게 되고 이 내용을 해당 회사의 오너에게 이메일로 보내지만, 무시당한다. 아, 여기서부터 느낌이 이상해지지 않는가? 그리고 영화는 예상할 수 있을 법한 결과를 낳는다. 투표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돕스가 당선이 된다. 돕스의 대통령 당선은 영화의 주요 사건이지만 사실 이 '웃픈' 상황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어쨌거나 변화를 향한 목소리는 언제나 보수적인 결정권자들에 의해 막힌다. 오너가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했다면 생기지 않을 문제였던 것. 둘째, 기성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이 다른 선택지를 발굴해내도, 투표 시스템의 오류로 예능 진행자가 대통령이 되는 그런 류의 희귀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정치는 잘 변하지 않는다.

영화는 정치를 향해 시민들이 끊임없이 요구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과 별개로, 이런 코미디를 통해 '현실 정치'가 얼마나 넘기 힘든 벽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3. <바비>(2006)

 영화 <바비>의 한 장면

영화 <바비>의 한 장면 ⓒ (주) 케이알씨지


"이 담장 너머에는 도움과 발전이 필요한 세상이 있습니다. 인류의 복지를 위해 보호되어야만 하는 세상이 말입니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 때는 1968년,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이 선거에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했다. 1961년 케네디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게 되는데, 당시 조직범죄 소탕과 노동계의 문제 해결에 애쓰는 한 편 흑인 민권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소수자의 지지를 받게 된다. '바비'는 로버트 케네디의 애칭이다.

<바비>(2006)는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 미국 사회 다양한 소수계층의 이해를 대변했던 정치인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6월 4일 엠베서더 호텔에서 총격에 암살당하던 그 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격동의 1960년대 미국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했고, 시민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으며, 흑인을 향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는 와중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다. '백인들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바비 케네디(로버트 케네디) 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영화 <바비>는 흥미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극 중에서 바비를 맡은 배우는 없다. 로버트 케네디 본인의 모습은 당시 자료영상으로만 나오고, 정작 영화는 그 날 저격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 개개인의 사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에게 1968년은 어떤 의미였고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는가'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1960년대 말의 시대상과 정치에 대한 염원이 반영되어 있는 이 영화가 주목하는 '개인'은 소수자 혹은 약자, 남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엠베서더 호텔의 도어맨 존 캐시(앤소니 홉킨스 분)은 호텔이 개장하던 때부터 40여년이 지나서까지 이 호텔을 지키고 있다. 아내와 사별하여 쓸쓸하게 지내는 캐시에게 그나마 추억할 거리는 엠베서더 호텔을 드나들던 역대 미국 대통령, 소련의 서기장, 유명 연예인 모두를 응접해본 경험이다. 격동의 미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소시민인 것이다.

영화는 베트남 전쟁이 낳은 비극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한 여성은 기혼자는 독일에, 미혼자는 베트남전에 배치되는 정책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엠베서더 호텔에서 위장 결혼을 감행한다. 남자친구인 윌리엄(일라이저 우드 분)의 베트남 파병을 막기 위해서 다이안(린제이 로한 분)이 아버지 몰래 짠 계획인 것이다. 반전시위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미국은 베트남에 계속 파병시키고 있었기 때문. 사랑조차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당신은 무엇을 대표하느냐'고 끈질기게 묻자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할리우드의 정치 영화는 이렇듯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어쨌거나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뤄나가려면 나와 우리가 끊임없이 관련된 논쟁을 벌여야 한다. 미국이 닉슨에 대해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야기하는 이유는 결국 정치는 국민을 위해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투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투표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정치를 고민하는 이들이 제도권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특히 제대로 된 공약을 내놓지 않아도 뽑히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 개인의 철학과 능력을 검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대표하는 정치인인가?

#선거 #정치영화 #닉슨 #로버트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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