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의 스틸컷.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주의! 이 글에는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화장실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한 남자. 언제나 입 끝에 환한 웃음을 띠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남자는 누구의 시선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공간에서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면대 우측 서랍장의 불투명 유리에는 남자의 그림자가 거한다. 그의 영혼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국제영화제가 사랑하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인 만큼 영화 <버닝>은 지난 20일 폐막한 제71회 칸영화제에서 비경쟁부문인 '국제비평가연맹상'과 '벌컨상'(신점희 미술감독)을 수상하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오션스8> 뉴욕 시사회장에서 있었던 CGV와의 인터뷰에서 "버닝은 매우 강렬한 영화(It's a very, very powerful film)이며, 영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그러한 영화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It's one of those films that takes a long time to process). 그렇다. <버닝>은 매우 강렬한 영화임에 틀림없으나,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너무나 모호하고 심오하다. 

종수, 해미, 벤... 이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인 종수(유아인 분)는 어느 날 복합 쇼핑몰 판매대에 물건을 배달하러 갔다가, 그 앞에서 이벤트 모델 알바를 하고 있는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과거의 기억을 언급하면서 친근하게 접근하는 해미와 달리 종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꾸밈없고 발랄한 매력의 해미와 금세 친해지고,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서 없는 동안 그녀를 대신해 고양이 '보일이'의 밥을 주기로 한다.

그날 그녀와 관계한 종수는 해미가 돌아오길 기다리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돌아온 해미는 벤(스티브 연 분)이라는 남자와 함께다.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갈 때는 시동이 겨우 걸리는 낡은 트럭 타고 이동하지만, 헤어질 때 해미는 뒤늦게 도착한 벤의 애마 '포르쉐'를 타고 가버린다. '노는 게 일'이라는 남자 벤의 고급스러운 세상에 들어서면서 종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힌다.

종수가 나고 자란 파주 집은 북한에서 송출하는 대남방송이 뚜렷이 들릴 정도로 휴전선 가까이에 있다. 사방을 산과 논밭이 둘러싸고 있고, 집 또한 금방 무너질 것만 같은 허름한 모습이다. 실내는 어둡고 어수선하며 인테리어는 고루하다. 어느 시점에선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금-여기'에 속하지 않은 듯한 집이다.

종수의 일과는 아버지의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해 먹고 가끔 소를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종수가 향하는 곳은 서울 산동네 해미의 집. 그는 해미의 작은 침대에 누워서, 운이 좋아야만 볼 수 있는 손톱만 한 햇빛을 기다리고, 해미를 기다린다. 종수의 영혼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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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예쁘고 생기 넘치는 여인을 전시하는' 벤

해미에겐 트라우마가 있다. 해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어릴 적 집 근처 마른 우물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누군가 구해주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몇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올려다본 동그란 하늘은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물들다가 점차 사라졌으리라. 때마침 지나던 종수가 어른들에게 알려 구조된 일화는 소녀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으나, 종수의 기억에는 없다.

종수뿐인가. 우물의 존재는 해미의 엄마와 언니의 기억에도 없고, 마을 이장님의 기억에도 없다. 해미는 가족으로부터, 친구, 연인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것으로 보인다. 어른이 된 해미가 연기처럼 실종된다 해도 그녀를 찾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 옛날 우물 사건 때와 마찬가지다. 샘이 마른 우물은 겉은 우물이지만 속은 우물이 아니다. 그녀의 영혼은 그날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버닝>의 스틸컷. 해미의 자취방에서 바라본 남산타워

영화 <버닝>의 스틸컷. 해미의 자취방에서 바라본 남산타워 ⓒ CGV 아트하우스


해미는 여러 해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미는 왜 빚 갚을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갔을까. 벤은 왜 그리 자주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일까. 두 사람에게 아프리카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해미는 부시맨  부족의 셔먼 춤인 '리틀 헝거(배고픔)', '그레이트 헝거(의미에 배고픔)' 춤에 깊이 사로잡혔다.

리틀 헝거이면서 동시에 그레이트 헝거인 해미의 춤은 그녀의 절박한 영혼의 말이며 추임새다. 해미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인 벤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해미의 헝거 춤을 시연토록 한다. 허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해미의 영혼이 실린 춤은 벤과 친구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해미가 실종된 후 벤에게는 중국에서 만난 새로운 파트너가 생겼다. 이처럼 벤의 빌라 거실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 '예쁘고 생기 넘치는 아가씨'를 전시하듯 특별전이 열린다.

 영화 <버닝>의 스틸컷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인간 소외'를 그린 영화 <버닝>

다시 세 사람이다.

오늘날 시간은 곧 돈이다. 벤에게는 시간도 있고 돈도 있다. 종수에게는 시간만 있다. 해미에게는 빚, 즉 빌려온 남의 시간만 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벤의 육체는 편안하지만, 그는 감정과 심장의 박동감이 없어 보인다. 인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으로부터 소외되어있다. 말초적 재미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심장의 박동은 살 수가 없어 두 달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심장에 '베이스'를 얻는다.

종수 역시 멍한 시선, 멍한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종수의 육체는 노동만 할 뿐, 욕망하지도 못하고 욕망해도 드러내지 못하거나 스스로 해결하곤 한다. 종수 또한 좌절감이 육체를 소외시키고 있다.

해미는 지독한 외로움이 자신의 몸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벤, 종수, 해미 모두 부적절한 감정 기제로 인해 육체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다고 피해 갈 수도 없고 돈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빠지는 것은 아닌 감옥, 바로 인간소외다.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자신이 '뭘 가졌는지'나 '뭐가 되었는지'에 집중하면 빠지는 감옥, 자신이 '어떠한지', '잘 있는지', 자신이 '존재함' 자체에 집중해야 빠지지 않는 감옥. 영화 <버닝>은 바로 이와 같은 감옥, '인간소외'의 문제를 다룬 영화다. 어쩐지 볼 때마다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예감,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 같은 예감에 다시 또 극장에 가고 싶어진다.

버닝 이창동 스티븐연 유아인 전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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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봐도 성경이 떠오르는 노잼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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