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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대학생들이 오월유가족 어머니와 간담회를 했다.
 춘천의 대학생들이 오월유가족 어머니와 간담회를 했다.
ⓒ 박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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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던 5월 춘천에서 출발한 우리는 광주에서 19일과 20일, 1박2일의 시간 동안 광주기행을 했다. 첫날인 19일에는 국립5·18민주묘역을 답사하면서 그곳에 계신 열사분들에 대해 배웠다. 20일에는 5·18 사적지 중 전남대학교를 답사하고 오후에는 두 팀으로 나뉘어 기록관과 도청을 답사했다.

모든 답사가 끝난 뒤 우리는 '옛 전남도청 농성장에서 어머님들에게 듣는 가슴에 묻은 오월 이야기'를 제목으로 옛전남도청 복원 농성장 지킴이 활동을 하시는 오월유가족 어머니와 간담회를 했다. 다들 떨리는 마음으로 간담회를 기다렸고 큰 박수로 어머님을 맞이했다. 우리를 보자 아들이 생각이 나신 건지 어머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눈물을 보이셨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님은 조금은 담담하게 얘기를 시작하셨다.

1980년 5월 어머니께서는 큰아들을 잃으셨다. 화순에서 미술을 하던 큰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점심을 먹으러 오던 중 군인들에게 잡혔다. 그 사실을 가족들은 몰랐다. 나중에 연락을 받고 찾으러 밖으로 나가보니 시내는 말 그대로 난리였고, 경찰서로 가니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저녁에 들어온 사람들은 벌써 새벽에 강물에 버렸고, 아침에 들어온 사람들만이 아직 감옥에 갇혀있었다.

아침에 다시 감옥에 가니 아들을 찾을 수 없었고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죽은 줄 아셨으나 군부대에 있을 수 있다는 소식에 찾아가셨다. 그곳에서 아들을 찾았지만, 당시 입은 부상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또한 계엄군의 무차별한 폭행에서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은 당시 고등학생으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에 찾아가다 총에 맞았다.

이번에도 아들이 실려 갔다는 소식에 온 가족이 함께 찾으러 다녔고 기독교병원에서 겨우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수술을 할 수 없게 막아 그곳에서 계속 치료를 받았고 결국 둘째 아들은 장애판정을 받았고 커다란 상처가 남았는데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어머님께서는 그래도 죽지 않아 행복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들들의 이야기를 어머니께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어찌 보면 담담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주셨다. 하지만 그 모습에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고 눈물이 났다.

어머님께서는 아들들의 이야기 말고도 당시 연락이 안 되던 광주의 상황과 가게들이 문을 열 수 없었던 이야기, 도청을 없애려 해 어머님들께서 막으셨던 얘기 등 많은 것들을 말해주셨다. 또한 "5·18은 사람들이 직접 보지 않았기에 잘 모른다. 학생들이 배우고 공부 잘해서 세상에 나오게 해달라"라고 말 하시며 "화면에 나온 것은 1/3 정도이다. 그때 당시 많이 다쳐서 현재도 병원에 계신 분들 많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사과만을 바라신다며 후유증 없이 다시는 이런 나라가 오지 않게 학생들이 협조해줬으면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다들 처음에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조심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어머니께서 생각하시기에 가장 고쳐야 하는 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진상 밝히고 잘못 시인해야 한다. 당시에 아들 못 찾고 20년 만에 찾은 분도 계신다. 얼굴이 없어서 피검사로 찾고 어떤 분은 옷 보고 자식을 찾았다.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보상받아서 잘 산다고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금남로와 도청을 보면서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에 "아들 찾으러 막 다니던 기억이 난다. 몰래 찾고 총소리가 들리면 숨으면서 찾았다"라고 하신 답에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저하고 동생이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5·18처럼 슬픈 역사를 배울 때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어머님께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좋게 배우자"라고 답하시며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질의응답 시간 동안 어머님은 질문 하나하나에 호응해주셨고, 정성스레 답해주셨다. 그런 어머님의 모습에 우리는 좀 더 가깝게 어머님께 다가갈 수 있었다. 간담회가 끝났지만, 어머님께서는 직접 만드신 아들의 모형과 종이학을 보여주시며 설명해주셨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간담회가 끝난 뒤 우리는 다시 춘천으로 돌아왔다. 1박 2일 동안 광주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느꼈다. 그중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고르자면 바로 간담회다. 광주로 떠나기 전부터 기대하던 순간이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책으로 자료로만 읽고 공부하던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머님에게는 실제로 겪고 아픈 상처를 준 날들이었고, 증언록을 읽으며 답사를 갔던 묘역들의 열사분들은 그때 당시를 같이 버텨나가던 이웃들이었다.

또 나에게는 이제 시작일 수도 있는 5·18이 어머니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었다. 이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간담회 동안 어머님의 말씀 하나하나에 웃고 울음을 참기도 했다. 인상 깊었던 점은 간담회가 끝나고 나서도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만드신 인형과 종이학을 보여주신 것이다. 간담회 자체도 너무 좋았지만 끝난 이후에도 무언가 더 보여주시고 설명해주시려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공부하면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5·18 그 이후 가족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그래서 어머님이 계신 '오월어머니회' 말고도 비슷한 여러 단체가 있다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 조금 더 내가 공부해 봐야 할 분야인 것 같다. 간담회에서 어머님께서는 5·18을 알아달라 계속 말씀하셨다. 1980년 5월에서 38년이 지난 2018년의 5월, 아직도 5·18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과 처벌받지 않은 가해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도 도청을 지키시는 분들이 계신다.

과연 우리 대학생들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잊지 말고 행동하자는 말밖에 답이 없는 것 같다. 아직 끝나지 않은 5월 언젠가는 그 끝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간담회를 해주신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태그:#5·18, #광주민주화운동, #오월유가족, #간담회, #전남도청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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