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 스팍스> 캘빈이 꿈 속에서 루비를 만난다

<루비 스팍스> 캘빈이 꿈 속에서 루비를 만난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수많은 과실나무가 있고 사방에 물줄기가 흘러, 땀 흘려 돌보지 않아도 언제든 신선한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동산에 두 남녀가 있다. 그러나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이 있으니, 동산에서 유일하게 먹어선 안 되는 선악과가 그것.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금기가 있고,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라는 유혹도 있다. 둘은 결국 선악과를 먹었고, 영생하는 천국에서 쫓겨났다. 둘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이다.

"에덴에 선악과를 두신 그분의 저의는 뭘까요?"

영화 <원죄>에서 주인공 에스더 수녀의 질문이다. 그녀에게 신은 시험하는 신이었을까. 사람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선악과'를 눈앞에 두고 '먹으면 죽으리라' 하셨을까. 사람을 약 올리시는 것일까. 내 말을 들으면 사랑하고 내 말을 어기면 내치려고?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처음부터 선악과 따위는 안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선악과 없는 에덴동산의 사랑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영화가 있다. 피그말리온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 <루비 스팍스>(감독 조너선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2012)이다.

꿈 속의 여성에 관해 글을 썼는데... 만약 그녀가 현실에 나타난다면?

 <루비 스팍크> 꿈 속 여인 루비가 집에 나타나자 당황해서 숨는 캘빈

<루비 스팍크> 꿈 속 여인 루비가 집에 나타나자 당황해서 숨는 캘빈 ⓒ (주)팝엔터테인먼트


천재 작가 캘빈(폴 다노 분)은 실은 10대에 쓴 데뷔작 하나로 여태껏 버텨왔다. 글쓰기에 대해 자신이 없고,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라곤 친형 하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어떤 여인을 만난 후 무료한 일상에 잔잔한 파동이 인다. 여자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던 중 그녀에 대해 아무 글이나 써보면 어떻겠냐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라, 캘빈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루비 스팍스> 꿈 속에서 캘빈은 루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루비 스팍스> 꿈 속에서 캘빈은 루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녀의 이름은 '루비 스팍스'.

그는 창작열에 불타 타자기로 그녀에 관한 스토리를 써 내려간다. 캘빈이 명명하는 대로 이름이 생기고, 캘빈이 정해주는 대로 그녀의 학창시절, 가족관계, 취향 등이 정해지면서 루비 스팍스(조 카잔 분)라는 아이덴티티가 생겨난다.

꿈속 공원에서 만난 루비는 주인 캘빈도 인정하는 반려견 스카티의 찌질함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아울러 반려견 이름을 대문호 스콧 피츠제럴드 이름을 딴 저의에 대해 거침없이 내지르는 그녀의 통렬함에 '아무리 꿈이어도' 압도당한다. 깨어나 소설을 더 써 내려간 캘빈은 출판사 편집자에게 새 소설을 보여주려고 나가려던 참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루비 스팍스>캘빈은 꿈속 여인 루비를 만나자 얼어붙는다

<루비 스팍스>캘빈은 꿈속 여인 루비를 만나자 얼어붙는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꿈속의 루비가 집 주방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한 캘빈은 그녀를 피해 다니다가, 결국 다른 사람 눈에도 루비가 보인다는 것을 알고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그녀와의 행복한 동거도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지고 루비의 입에서 '사랑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캘빈은 이렇게 타이핑을 하고야 만다. "루비는 캘빈이 없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루비의 행동을 조작하면 할수록 바뀐 루비의 행동에 더 실망하게 되는 캘빈.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선악과 없는 에덴동산'의 악몽을 그린 듯한 <루비 스팍스>

 <루비 스팍스> 캘빈은 새아빠와 결혼한 후 변한 엄마의 모습이 낯설다

<루비 스팍스> 캘빈은 새아빠와 결혼한 후 변한 엄마의 모습이 낯설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캘빈이 여자친구 루비를 데리고 시골집을 방문하자 엄마 거트루트(아네트 베닝 분)는 무척 기뻐한다. 그러나 캘빈은 엄마가 낯설다. 아빠와 사별한 후 모트(안토니오 반데라스 분)와 재혼한 엄마의 행동이 예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아빠와 살았을 때는 셔츠를 입고 고기를 굽던 평범한 주부였던 엄마는 지금 뭔가 히피스럽고 약간 무식해 보이기까지 하는 새아빠의 세상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 그 자체다. 엄마는 자신을 버리고 새아빠에게 맞춘 것일까, 아니면 새아빠를 만나면서 그녀 안에 있던 숨겨진 본능이 나와 잘 맞게 된 것일까. 아니면 새아빠에게도 신비한 타자기가 있어서, 캘빈 엄마의 행동을 조작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조작이 더할수록 실망하고 어긋나는 캘빈 커플과는 달리 엄마와 새아빠의 일상은 아주 안정적이니까.

캘빈은 루비를 창조했고 자신의 세상에 대가 없이 머물게 했으나, 루비가 그의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를 감금하고 행동을 조작할 수는 있었지만 그녀로부터 사랑은 얻을 수 없었다. 그녀가 주는 사랑은 그녀로부터 온 사랑이 아니라, 캘빈이 명령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주문한 사랑을 얻어서는 행복할 수 없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인간을 가두려는 자물쇠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원하는 신이 마련한 열쇠가 아니었을까.

선악과 없는 에덴동산의 악몽을 그린 <루비 스팍스>는 지난 2012년에 개봉한, 그러니까 5년이나 묵은 영화이다. 이미 다운로드 시장에 풀려 어디서나 편한 시간에 더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지난 10일 개봉(2012년 제작, 국내는 최초 개봉)해 대형 스크린에 소환됐다. 마치 사랑하는 힘의 보상은 조금 늦게 찾아오는 진리를 <루비 스팍스>는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돈이 없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다는 요즘, 아나로그식 사랑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루비 스팍스>를 추천하고 싶다.

루비 스팍스 폴 다노 조 카잔 선악과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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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봐도 성경이 떠오르는 노잼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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