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입니다. 그동안 국가의 폭력성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하고, 고발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들은 다양한 시각에서 '진실과 거짓'을 진단하면서, 우리 현대사를 성찰하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이중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몇몇 작품을 또 다른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알약'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알약'이란?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 ⓒ 영화사 마농(주)/씨네클럽봉봉미엘


고등학교 교과서 '윤리와 사상'의 한 구절에서는 매트릭스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계가 꿈이고, 바깥에 비참한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빨간 약을 선택하면 기계장치에 연결되어 생체 배터리로 살아가는 비참한 진짜 세계로 나가게 되고, 파란 약을 선택하면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세계에 머물게 된다. (중략) 

매트릭스에서는 한번 빨간 약을 먹은 사람이 다시 파란 약을 먹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한번 진실에 눈뜬 사람이 '자의적으로' 눈을 감으려 한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쓰고 괴로운 빨간 약 대신 달콤한 파란 약을 택한 건 어쩌면 대단히 인간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책 없이 비참한 빨간 약의 세계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가짜인 파란 약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요컨대 '고통스러운 진짜'와 '편안한 가짜'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들어야 되는 공동체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영화 <박하사탕>이나 <택시 운전사>는 매트릭스 못지 않은 현실적인 대답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 드라마 <모래시계>(1995)와 목격자들 

 SBS 드라마 '모래시계' 포스터.

SBS 드라마 '모래시계' 포스터. ⓒ SBS


어쩌면 5월 18일의 현장을 지상파 방송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려 노력한 첫 작품입니다. 특히 당시의 실제 기록물을 드라마에 끼워넣어 사실성을 더하는 연출력을 보였습니다. 드라마는 특히 국가 폭력 속에서 겪는 광주 시민의 아픔을 담아내면서, 대중에게 그 실상을 알리는데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주인공 박태수(최민수 분)는 광주 시민은 아닙니다. 조직폭력배를 떠나 고향에 정착한 후배를 만나기 위해 광주로 갔다가 본의 아니게 5·18 현장의 격랑에 휩쓸리게 됩니다. 현장의 목격자이면서 정의로운 지원군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태수가 광주에서 빠져 나오면서, 광주의 이야기는 드라마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드라마 전개의 줄거리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임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2) 드라마 <제5공화국>(2005)과 가해자들 

 드라마 '제5공화국'의 한 장면

드라마 '제5공화국'의 한 장면 ⓒ MBC


다큐멘터리 형식이지만, 역시 적지 않은 분량을 통해 5.18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 이 과정에서 희생자 개개인의 삶을 조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의 주인공이 유비, 조조, 손권, 관우인 것처럼 이 드라마도 어쩔 수 없이 국가 폭력의 주역이 전면에 배치됩니다. 우리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농사짓고 열심히 살다가 나라에서 부르니까 영문도 잘 모른 채 적벽 대전에 끌려가 화공에 불타 죽은 중국의 한 농부를 연상하지는 못합니다. 그들도 엄연히 부모와 아내, 자식이 있는 삶의 주인공이지만 텍스트의 구조상 유비와 조조의 후광에 가려 전란의 소모품이 되어 버립니다. <제5공화국>도 그런 한계가 있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3) 영화 <화려한 휴가>(2007)와 피해자들 

 영화 '화려한휴가' 포스터.

영화 '화려한휴가' 포스터. ⓒ 기획시대


<화려한 휴가>는 '빨간 약'을 먹어도 고통과 절망뿐이라는 현실을 본격적으로 재현합니다. <제5공화국>과는 정 반대의 시각과 입장에서 영화가 전개되지요. 이 때문에 사실성을 해치는, 다소 과장된 감수성이 있어 보이지만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타인의 희생과 아픔에 대해 공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가족을 잃은 슬픔은 말할 수도 없지요.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의 공판장에서 광주의 유가족들이 '내 자식 살려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당시 전직 대통령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제압을 하더군요. 그게 1995년에도, 법의 심판장에서 버젓하게 벌어진 일입니다.

(4) 영화 <박하사탕>(2000)과 2차 피해자들 

 영화 '박하사탕' 포스터.

영화 '박하사탕'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지난 4월 재개봉했던 영화 <박하사탕>은 국가 폭력의 범위를 확장시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매트릭스>의 공식을 적용하면, "파란 약의 세계에서 당신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영화는 실제로 5.18을 적은 분량밖에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담긴 원죄 의식과 지속되는 국가의 간접적인 폭력성이 2차, 3차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매트릭스>에서 '존스 요원'은 무의미한 학살을 계속하다 결국 자기 삶도 파멸합니다.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는 스무살 1979년 첫사랑 연인과 아름다운 들꽃 사진 찍기를 꿈꾸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과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루저'로 전락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영호는 첫사랑의 설렘이 담긴 장소에서 술에 취해 이른바 '진상'을 부립니다. 철길에 올라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순간 기차가 달려 옵니다. 그 기차를 <매트릭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영화는 기차가 선로를 되돌아가는 역행적인 구성을 통해 영호의 과거를 파헤치고 있지만, 그 선로가 변하지 않는다면 새로 출발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는 나치의 아이히만처럼 '파란 약'의 세계에서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파멸하는 영호를 통해 관객은 '빨간 약'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5) 영화 <택시 운전사>(2017)와 '빨간 약'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 (주)쇼박스


주인공인 택시 운전사 만섭(송강호 분)은 빨간 약과 파란약의 선택을 두고 본격적인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기자를 광주 현장에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이었지요. 그가 현실을 목도한 순간, 그는 이미 '빨간 약'을 먹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를 홀로 키우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섭이 순천 버스 터미널에서 아이의 신발을 살 때, 배경음악은 둘의 사랑을 약속하는 혜은이의 '제3한강교'가 흘러갑니다. 그리고 만섭은 터미널 국수집에서 가짜 소식지와, 주먹밥, 그리고 국수 그릇앞에서 갈등하다 결국 다시 '빨간 약'을 선택하게 됩니다.

마지막의 두 작품은 학생들에게 왜 '빨간 약'을 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적지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원초적인 국가 폭력의 고발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개인이 왜 공동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공동체에 무관심하다면, 자신의 삶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5.18을 다룬 많은 드라마와 작품들은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한번 쯤 '빨간 약'의 진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런 노력들이 합쳐질 때, 영호가 타고온 기차의 선로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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