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씨 오브 트리스> 메인포스터 <씨 오브 트리스> 메인포스터

▲ <씨 오브 트리스> 메인포스터 <씨 오브 트리스> 메인포스터 ⓒ (주)영화사 오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사랑이라는 감정의 마지막 모습이 이별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그 어떤 사랑도 '죽음'으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에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많은 감독들은 사랑에 빠진 연인을 한쪽의 죽음으로 내몰아 비극을 이끌어내거나, 그렇게 홀로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더듬는 과정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영화 <씨 오브 트리스> 역시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아내 조안(나오미 왓츠 역)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주인공 아서(매튜 맥커너히 역)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찾은 '아오키가하라 숲'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을 그려낸 작품. 아내와 함께했던 과거의 시간이 주를 이루는 회상 장면과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타쿠미(와타나베 켄 역)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현재의 장면이 끊임없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확장되어 나간다. 그가 이 숲을 찾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또, 그녀의 죽음 앞에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절망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 (주)영화사 오원


02.

이 영화 <씨 오브 트리스>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서다. 그 과정에서 조안의 이야기가 아서가 숲으로 향한 동인이 되어 스토리의 한 축을 담당하고, 타쿠미와의 이야기 역시 그동안 숨겨져 있던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작품의 후반부, 모닥불 앞에 앉아 타쿠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에 도달할 때까지 아서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아서의 이야기이기는 하나, 아서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것은 그 자신의 고백 이전에 존재했던 상황들이기 때문에, 외부의 정보들로 아서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가도록 장치한 감독의 연출 방식은 극의 흐름을 조금도 놓칠 수 없도록 만든다.

03.

가장 먼저 등장하는 회상 장면에서 조안은 주유 도중 더러워진 아서의 손을 세심하게 닦아준다. 부부의 관계가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지는가 싶던 순간, 아내의 립스틱을 찾아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크게 싸움이 일어난다. 실제로 조안이 아서에게 화가 났던 것은 자신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이유다. 아서는 그런 조안에게 언제나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감정을 드러낸다며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두 사람이 대립하는 장면은 <블루 발렌타인>(2010)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갈등, <래빗 홀>(2010)에 등장하는 부부의 갈등만큼이나 치열한데, 사실 조금 지나고 보면 아서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편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잘못의 크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페널티가 훨씬 크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조안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지도 못한 채로.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에 그만 울부짖고 만다. 삶이 흔들리는 순간이 와야 그제서야 그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며 말이다. 이제는 그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한들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 (주)영화사 오원


04.

아내는 그를 향해 삶에 의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며 비난했지만, 숲에서 조난당한 그의 모습은 전혀 그래 보이지가 않는다. 언제 죽음을 맞이했는지 이미 미라가 되어 사체가 된 이의 옷을 벗겨 입는 것은 물론, 비를 피해 그 사체가 잠들어 있는 텐트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불사할 정도로 처절하고 절박하다. 삶을 포기하기 위해 숲을 찾아왔지만, 이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아서가 이 숲을 찾은 이유가 단순히 절망감에 삶을 포기하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던 이유다. 가장 완벽한 장소에서 눈을 감아 달라는 그녀의 유일한 유언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처럼 초라한 모습이 아니길 바란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유와는 무관하게 죽음을 목적으로 방문한 숲에서 살아남고자 하고, 그 결과 살아남게 된 아서의 모습은 죽음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과는 무관하게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나버린 조안의 모습과 겹쳐지며 운명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05.

'영혼이 이곳을 떠나면 꽃이 핀다고들 해요.' 정작 이 대사가 등장할 때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후반부에서 아서가 다시 한 번 숲을 찾아가는 장면에 다다르게 되면 타쿠미의 진짜 정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처음으로 돌아가 숲을 찾아온 아서가 삶을 포기하기 위해 알약을 삼키던 장면을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다량의 알약을 한꺼번에 삼키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한 알씩 두 번을 삼키다 길을 잃고 숲을 배회하던 타쿠미를 만나게 되는 것. 물론, 약효가 퍼지는 시간의 범위와 이틀을 함께 보낸 시간을 생각한다면 해석에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쿠미를 아서의 내면에 존재하던 어떤 영혼 혹은 그의 삶을 붙들게 하기 위한 영적 존재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전혀 무관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내가 생전에 어떤 것들을 좋아했는지 알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빠졌던 아서의 모습 역시 같은 해석에 놓을 수 있다. 조안은 그를 향해 의욕도 없고 무심하며, 자신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바람도 피운 전력이 있고 사이가 틀어진 이후에는 서로 감정을 숨기기는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에 치이던 조안이 소파에서 자고 있을 때 사랑스러운 표정을 보냈던 것도 그였고, 아내가 좋아하던 차가 떨어지지 않도록 몰래 채워 넣어 두었던 것도 그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타쿠미의 아내와 딸 이름을 번역하면 노랑과 겨울이 된다고 하는데, 역시 그는 그녀에 대해 몰랐던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인 게 아니었을까? 타쿠미가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영적인 존재라 해석할 수 있다면 말이다.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씨 오브 트리스> 스틸컷 ⓒ (주)영화사 오원


06.

아서가 찾은 '아호키가하라 숲'에서 이 공간을 방문한 이들이 생명줄을 걸어가며 숲의 깊은 곳을 향하는 행위는 원래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마다 묶여있는 수많은 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의 생명은 하나입니다. 소중히 여겨주세요.'라는 숲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표지판의 문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글의 처음에서 영화 <씨 오브 트리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상실에 대한 아픔을 가진 이들에 대한 것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자신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어떤 위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감독인 구스 반 산트가 지난 작품들을 통해 사회의 경계에 몰려있던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왔다는 점과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이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쯤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 보낸 사랑이 있거나, 지나온 시간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발목에 채워둔 죄책감들을 아직도 끌어안고 있는 이들이라면 분명히 이 영화를 통해 따뜻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무비 씨오브트리스 구스반산트 매튜맥거너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