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조상연

관련사진보기


'사랑하는 딸에게 부치는 편지'

한낮, 은비늘 반짝이는 강물에 돌 하나 던졌다. 잔잔한 강물에 동그랗게 꽃이 피더니 부끄러워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처럼 이내 사라졌다. 장에 간 엄마 돌아오면 따듯하게 해준다며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던 한재도 아궁이 속의 불꽃과 함께 이내 사라졌다.

귀신이 들었다며 용한 무당이 굿을 하고 법력 높은 스님의 부적도 소용없이 아궁이 앞에서 불꽃만 보면 뒹굴었던 한재. 은비늘 반짝이던 고향의 강물, 붉은 동백 같은 불꽃이 일렁이던 아궁이, 그 어디에도 한재라는 꽃이 피었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동네 아재들은 총각이 죽었다며 상여도 안 태우고 들것으로 실어다가 임자 없는 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놓고 봉분도 없이 목련 한 그루 심어 '여기는 한재 묻힌 곳' 표시를 해놓았다.

아버지 기억에 선명한 사람 한재. 한재는 아버지 고향 친구의 형인데 홀어머니랑 살았다. 한재 형의 동생이자 아버지 친구인 명재는 어려서 서울로 돈 벌러 나가 명절 때나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됐는데 명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도 아궁이 앞에서 발작으로 죽고 난 뒤 연락이 끊겼다.

명절날 고향을 찾아가면 한재는 반갑다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원래 몸이 그랬다.

실버들 늘어진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나물 캐어 밥을 짓는
정다워라 초가삼간


한재는 노래를 마치면 담배나 사 피우라며 서울 올라갈 차비 3, 4만 원 모두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할머니의 말이 한재는 계절 하나가 다 가도록 상연이가 담뱃값을 주고 갔다며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담배를 피울 적마다 자랑했단다.

그리고 한재의 자랑이 끝나면 담배도 떨어졌다는 걸 동네 사람이 다 알았다. 두 달만 참으면 상연이 온다고 위로를 해줘도 소용없었다. 목련이 피고 지는 계절 4월, 담배를 너무 피워 손가락 두 개가 노랗던 한재는 그렇게 고향 사람 모두의 곁을 떠났다.

상갓집에 의당 걸려있어야 할 근조라는 큼직한 글씨가 쓰인 밝은 조등이 아니라 어른 주먹만 한 목련이 조등을 대신하고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한재는 고향을 등졌다. 그래서 더 아버지 기억에 선명한 사람 한재.

목련이 피고 지는 4월이 오면 아버지는 정일근 시인의 '사월에 걸려온 전화'가 생각나고 한재가 생각이 난다. 4월이 오면 뜬금없이 잊고 있던 친구 명재가 생각나고 담배 몇 보루 생긴다는 희망에 계절이 바뀌도록 아버지 이름을 불러가며 기다리던 그의 형 한재. 그를 생각하면 목련 그늘 아래서 울컥 참아왔던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지금은 소식이 끊긴 아버지 친구 명재에게도 아버지와 똑같은 사월의 추억이 있을 테고 아버지는 내년에도 사월의 목련 그늘 아래서 한재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일근 시인의 '사월에 걸려온 전화' 속에는 첫사랑의 여자가 등장하지만 아버지에게는 한재도 명재도 첫사랑 못지않은 그런 친구이기에,

네게 시 하나 소개하기 위해 아버지 옛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명재, 한재, 아버지, 셋을 묶어놓으면 이도 사랑이 아니겠느냐? 이래서 우리는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나니......

-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굣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가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태그:#모이, #딸바보, #아버지, #딸사랑, #벗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편안한 단어로 짧고 쉽게 사는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http://blog.ohmynews.com/hanas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