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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영원한 오월광대'라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효선이다. 윤상원과 같이 광주항쟁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27일 밤 윤상원과 함께하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도청 앞 YMCA회관에 있다가 새벽에 회관을 나왔다. 그는 그때 일을 글로 남겼다. 글 제목은 〈자백〉이다. 어느 해에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995년쯤에 쓴 것으로 짐작한다.

어쨌든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은 내가 5월 광주로부터 도피했다는 사실이다. 난 지금도 사실에서 진실을 찾고 싶다. 그래야만 내가 나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 야심한 밤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총을 든 채로 도청 부근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중략) 난 어쩌면 살인자다. 그 마지막 날 밤 자정 부근, YMCA에서 잠들어 있던 백여 명의 청년들을 도청으로 데려다주고 난 다시 Y로 돌아와 총을 들고 이층 한 사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책상 밑에 엎드려 있었다. (중략) 난 그렇게 한두 시간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문득 도망쳐야 한다고 난 생각했다.
-<박효선전집3-일기·수기>(황광우 엮음, 연극과인간, 2016), 51∼52쪽


그날 밤 27일 도청 전투에서 〈금희의 오월〉 주인공 이정연도, 윤상원도, 박용준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말한다. "난 지금도 사실에서 진실을 찾고 싶다"고. 그가 도청을 나온 것은 사실이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는 이 진실을 피하지도 애써 부정하지도 않는다. 1998년 9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아니 살아 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80년 오월의 현장을 떠난 본 적이 없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부끄러움이 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몫

27일 그날 밤, 한 여인의 처절한 방송이 있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도청 앞으로 나와 광주를 지킵시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근 김선옥(56)씨로 밝혀졌다. 그는 그때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다. 또 골목 방송을 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도청 옥상에 걸린 확성기가 고성능이어서 도청 둘레 10킬로미터 안 사람들은 이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광주 시민들은 김선옥씨의 울부짖는 호소를 들으며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용없었다. 당장 나가야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여인의 절절한 호소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가 도청을 빠져나온 것이나 여인의 부름을 듣고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이지만 그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죽는 그날까지도 자신을 책망하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몫을 찾아나갔다.
1988년 4월 서울 미리내소극장에서 〈금희의 오월〉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황석영(왼쪽)과 함께한 사진이다.
▲ 황석영과 박효선 1988년 4월 서울 미리내소극장에서 〈금희의 오월〉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황석영(왼쪽)과 함께한 사진이다.
ⓒ 연극과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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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들의 '하숙집 주인' 윤정모

광주항쟁 지도부였던 박효선은 곧바로 지명 수배자가 된다. 지명수배 전단지 사진 바로 아래에는 '자칭 전남도청 홍보부장'이라 써 있었다. 그는 윤상원이 중심이 되었던 시민투쟁위원회의 홍보부장이었던 것이다.

박효선은 광주를 벗어나 서울 삼양동 꼬방동네 김지선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김지선은 노회찬 의원의 부인이고, 이때 그는 삼원섬유에서 해고되어 삼양동 공장에 다니며 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박효선은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소설가 정찬주 집에, 또 황선희 선생 집으로 몸을 피했다. 당시 정찬주는 상명여대부속여고 국어 교사였고, 황선희 선생은 황석영의 누이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배 생활을 도왔다.

박효선은 서울에서 1년 남짓 숨어 지내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온다. 그리고 윤한봉과 함께 소설가 윤정모 집으로 피신한다. 윤정모는 당시 수배자들을 숨겨주고 돌봐주는 '하숙집 주인'이었다. 윤정모는 이 일을 세 해 남짓 맡아 했고, 그들을 만나면서 그의 소설도,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뀌어 갔다. 광주 이야기 <밤길>도 이렇게 태어났다. 윤정모는 <누나의 오월> 머리말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거의 박효선씨한테서 온 것이다. '누나의 오월'이라는 제목도 그이의 '금희의 오월'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연극 <금희의 오월>과는 다르다. 단지 제목만 비슷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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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모의 청소년소설 《누나의 오월》(산하) 표지 ·
ⓒ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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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 헌혈을 했다

<누나의 오월>은 초등학교 4학년 이기열의 누나 이기순이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어떻게 해서 80년 5월에 저세상으로 떠났는지 말해 주는 소설이다. 아버지는 기순이 중학교를 졸업하자 더는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둘째 '아들' 기열을 공부시키기 위해서다. 기순은 기열의 대학 학자금을 모으려고 기르던 암소를 몰래 시장으로 끌고 가 팔려다 아버지에게 붙잡혀 붙들려 온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기순은 집을 나간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고, 이제는 기열을 도시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님도 기순의 말을 따라 기열을 광주로 전학시킨다.

자취방은 금남로 가까이에 있었다. 기열은 4학년이다. 기순은 기열을 공부시키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공장일을 그만두고 금남로 옆 황금동 황금다방에서 차 배달을 한다. 바로 이때 5·18이 터진다. 누나는 금남로에서 피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헌혈을 한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한다. 5월 26일, 기순은 공수부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기열과 함께 시골집으로 간다. 기열을 시골집으로 데려다놓고 다시 광주로 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차편이 모두 끊겨 걸어서 가야 했다. 기순은 헌혈을 너무 많이 해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진다. 그리고 결국 그 다음 날 "아부지, 기열이는 꼭 공부시켜 줘요" 하는 유언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앞 맨 왼쪽이 박기순이다. 들불야학 교사들은 청소년 노동자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다시 노동자의 삶을 배운다는 뜻을 담아 강학(講學)이라 했다. 들불야학은 1978년 광주시 서구 광천동성당 교리실을 빌려 문을 열었다. 이 야학을 맨 처음 꾸리자고 팔을 걷어붙인 이가 박기순(당시 전남대학교 사학과 3학년)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들불야학을 연 해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세 해 뒤 1982년 2월 20일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린다. 영혼결혼식 때 창작노래극 ‘넋풀이’를 했는데, 이 노래극을 소설가 황석영 집에서 녹음했다. 노래 일곱 곡 가운데 가장 마지막 대미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윤정모가 《누나의 오월》에서 누나 이름을 ‘기순’이라 한 것은 들불야학의 박기순을 염두에 두고 지었을 것이다.
▲ 1978년 제1기 들불야학 강학들 앞 맨 왼쪽이 박기순이다. 들불야학 교사들은 청소년 노동자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다시 노동자의 삶을 배운다는 뜻을 담아 강학(講學)이라 했다. 들불야학은 1978년 광주시 서구 광천동성당 교리실을 빌려 문을 열었다. 이 야학을 맨 처음 꾸리자고 팔을 걷어붙인 이가 박기순(당시 전남대학교 사학과 3학년)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들불야학을 연 해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세 해 뒤 1982년 2월 20일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린다. 영혼결혼식 때 창작노래극 ‘넋풀이’를 했는데, 이 노래극을 소설가 황석영 집에서 녹음했다. 노래 일곱 곡 가운데 가장 마지막 대미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윤정모가 《누나의 오월》에서 누나 이름을 ‘기순’이라 한 것은 들불야학의 박기순을 염두에 두고 지었을 것이다.
ⓒ 들불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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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80년 5월, 그때 광주 시내 모든 병원은 총탄에 맞고 곤봉과 총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골병이 든 사람들로 병상이 남아나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부상자가 많아 날마다 피가 부족했다. 남자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총을 들고 싸워야 했기에 헌혈은 여자들 몫이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뿐만 아니라 공장 여성 노동자를 비롯하여 황금동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줄을 섰다. 기순도 그랬다.

그때 춘태여상 3학년 '박금희' 학생도 날마다 헌혈을 했다. 박금희는 21일 기독교병원에서 헌혈을 한 뒤 집으로 오다 공수부대가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다. 한 시간 전에 헌혈을 하고 나온 병원으로 다시 시체가 되어 간 것이다.

윤정모는 바로 그때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생을 밀어 넣었던 사람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딱 그만큼만 내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밀고 나갔던 사람들의 생을 붙잡는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피를 내놓았던, 그 여리고 순박한, 채 스무 살도 못 넘기고 저세상으로 떠난 이기순의 생을 들려준다. 하지만 누가 기순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런 것을 낱낱이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80년 오월 광주를 아주 자세히 들려주는 그 어떤 소설보다 더 깊은 감동을 준다.

맨 오른쪽이 김영철이다. 그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기반으로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주민들의 삶을 돌보고 가꾸는 주민운동가였다. 1978년 그는 이곳에 자리 잡은 들불야학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80년 5월에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아 윤상원, 박용준과 함께한다.
▲ 1978년 제1기 들불야학 강학들 맨 오른쪽이 김영철이다. 그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기반으로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주민들의 삶을 돌보고 가꾸는 주민운동가였다. 1978년 그는 이곳에 자리 잡은 들불야학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80년 5월에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아 윤상원, 박용준과 함께한다.
ⓒ 들불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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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이 있었다

광주 사람들이 80년 오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가 또 있다. 김영철이다. 그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았고, 27일 도청에서 윤상원과 함께 끝까지 싸운 사람이다. 그날 밤 윤상원은 바로 곁에서 총에 맞아 죽고, 그는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다. 군인들은 그를 북한에서 밀파한 간첩으로 몰면서 온갖 고문을 했다. 김영철은 윤상원과 박용준을 따라 죽고 싶었다. 왼손 동맥을 끊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이번에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이마를 세 번이나 부딪힌다. 그 뒤로 그는 정신을 아주 놓아 버린다. 1984년 나주정신병원에 들어가고 그 뒤 16년 남짓 나주정신병원과 여러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1998년 8월 세상을 떠난다.

1982년 1월 3일, 박효선은 김영철을 만나고 와서 일기를 쓴다.

네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미쳤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한 사람이 나였다.
-<박효선전집3-일기·수기>(황광우 엮음, 연극과인간, 2016), 63쪽

여기서 죽은 두 사람은 윤상원과 박용준이고, 미친 사람은 김영철이고, 살아남은 사람은 박효선이다. 박효선에게 김영철은 여섯 살 위 형이다. 박효선은 1997년, 그러니까 김영철이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그와 그의 부인 이야기 〈청실홍실〉을 무대에 올린다. 사람들은 이 연극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 해 뒤 김영철은 1998년 8월 세상을 떠난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죽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지나 박효선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박효선의 나이 45세였다.
이 소설은 제1회 5·18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다.
▲ 한정기의 어린이소설 《큰아버지의 봄》(한겨레어린이) 표지 이 소설은 제1회 5·18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다.
ⓒ 한겨레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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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기의 어린이소설 <큰아버지의 봄>

<큰아버지의 봄>에 나오는 큰아버지 박원상은 도청 밖에서 붙잡혔다. 같이 도청에 있었던 아버지가 형은 꼭 살아야 한다고, 어머니한테는 형이 있어야 한다고, 형이 나가지 않으면 당신도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도청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날 아버지와 큰아버지 애인 은수 이모는 어떻게 살아남았지만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큰

아버지는 도청에 끝까지 남지 않고 빠져나온 것이 이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바로 그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김영철이 그랬듯 박원상 또한 정신을 놓아 버린 뒤 80년 5월 그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깨어있을 때도 잠을 잘 때는 80년 5월 광주에 있었고, 그곳에서 살았다. 시간이 80년 5월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광주 그곳에 있었다. 시간도 세월도 그를 잡아끌지 못했다.

아버지와 은수 이모는 큰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들 때문이라고 괴로워한다. 큰아버지가 마음먹은 대로 그곳에 남았다면 죽든 살든 적어도 지금과 같이 정신병원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렇게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고집을 부려 형을 도청 밖으로 피하게 한 것이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큰아버지가 죽고 씻김굿을 하는 날 아버지는 서럽게 흐느낀다. "형님, 내가 잘못했소. 죽는 게 무서워 형을 그리 만들고 말았소. 으흐흐흑! 나는 비겁한 겁쟁이요. 용서하시오." 그리고 작가는 아버지의 후회와 주인공 경록이가 동이의 괴롭힘을 이겨 내는 것을 겹쳐 보여 주면서, 용기가 뭔지, 그 용기로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어떨 때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지, 사람이 비겁해지면 무엇을 잃고 마는지 일러준다.

광주에 들불 열사 일곱 분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이 있다. 모두 들불야학에서 교사로 일했던 사람이고, 80년 5월 항쟁 지도부에서 항쟁을 이끌었던 분이다. 2002년 5월 19일 일곱 분 열사를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이 추모비를 세웠다. 들불열사 일곱 분의 삶을 더 알아보려면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http://www.deulbul.co.kr)에 가면 자세히 알 수 있다.
▲ 들불열사 추모비 광주에 들불 열사 일곱 분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이 있다. 모두 들불야학에서 교사로 일했던 사람이고, 80년 5월 항쟁 지도부에서 항쟁을 이끌었던 분이다. 2002년 5월 19일 일곱 분 열사를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이 추모비를 세웠다. 들불열사 일곱 분의 삶을 더 알아보려면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http://www.deulbul.co.kr)에 가면 자세히 알 수 있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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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오월의 열사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우리는 그 열흘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결정을 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책에서 읽었을 때 어떤 것을 새롭게 배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머릿속에 훤히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오늘 어떤 것을 새롭게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윤정모의 청소년소설 <누나의 오월>과 한정기의 어린이소설 <큰아버지의 봄>이 그렇다. 두 소설은 80년 오월을 '자명하게'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 소설을 읽으면서 춘태여상 박금희를, 들불야학 박기순을, 시민군 윤상원·박용준·김영철을, 영원한 광주의 홍보부장 박효선의 삶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태그:#윤정모, #누나의오월, #한정기, #큰아버지의봄,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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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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