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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 졸업한 지 십 년이 지난 제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매년 스승의 날이 다가오는 이맘때쯤 제자는 잊지 않고 2학년 때 담임인 내게 전화하곤 했다.

"선생님, 졸업생 '연자'예요. 아니 '연숙'이에요. 잘 계시죠?"
"방아구나! 연자방아."
"선생님, 농담 그만 하세요."
"참, 이름 개명했지? '연숙'이로."

반가움에 학창시절 제자의 별명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러자 제자는 화를 내는 대신 웃기만 했다. 세월이 지났지만,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아이의 이름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그 아이는 자신의 이름인 '연자'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곤 했다. 아이들은 그 아이의 이름인 '연자'에다 방아를 붙여 '연자방아'라고 불렸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이름인 '연자'를 빼고 '방아'라고 불렀다. 심지어 짓궂은 일부 아이들은 이름 대신 '방아타령' 노래를 부르며 그 아이를 놀리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제자는 아이들과 심하게 다투기도 했고, 전학을 가겠다며 담임인 나와 상담을 자주 했다.

결국, 제자는 이름을 '연숙'으로 개명했고 그 이후 이름으로 놀림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제자를 볼 때마다 이름 때문에 곤욕을 당했던 나의 어릴 적 생각이 떠올려진다.

1974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환희 담배'가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하자 '환희' 이름을 가진 나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까지 국내에 시판되었던 담배의 상표명. 한갑에 100원이라는 당시로서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됨. 하지만 독하기만 할 뿐 맛은 별로였다고 함. 그 때문에 당시 애연가들은 환희를 피우느니 차라리 100원을 더 보태서 솔을 피웠다고 함.
 1980년대까지 국내에 시판되었던 담배의 상표명. 한갑에 100원이라는 당시로서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됨. 하지만 독하기만 할 뿐 맛은 별로였다고 함. 그 때문에 당시 애연가들은 환희를 피우느니 차라리 100원을 더 보태서 솔을 피웠다고 함.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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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환희 담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름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거의 없었다. 간혹, 여자 이름 같다며 놀림을 당한 적은 있었지만 모든 아이는 내 이름이 예쁘다며 부러워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기란 여간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 이름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심지어 선생님께서 출석을 부를 때도 이름이 멋있다며 한 번 더 불러주기도 했다. 내 이름 때문일까? 거의 모든 학생이 나를 알아볼 정도였다.

그런데 '환희 담배'의 등장으로 나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나를 부를 때 이름 대신 '담배'라고 불렀고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며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심지어 담뱃값(100원) 때문에 붙여진 별명 하나가 더 있었다. "백 원"

아이들의 놀림은 갈수록 심해졌고 '환희 담배'를 즐겨 피우시던 한 선생님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내 생각을 한다며 농담을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웃음 섞인 농담이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아 더 화가 났다. 더는 이런 놀림을 참을 수 없어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에게 개명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문중의 항렬을 따져 이름을 지었다며 개명(改名)은 불가하다고 하셨다. 개명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개명을 요구하는 나의 주장은 끊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아버지께서는 개명 대신 이웃 학교로의 전학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전학을 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아버지의 생각은 큰 오산(誤算)이었다. 전학을 가서도 아이들의 놀림은 이어졌다. 오히려 이전의 학교보다 아이들의 놀림이 더 심했다. 아이들의 놀림 때문에 전학을 다닌 것만 세 번이나 되었다.

'환희 담배'가 시중에서 단종(斷種)되기까지 내 이름은 놀림의 대상이 되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그 놀림에 내 반응은 다소 무덤덤해졌다. 1988년 마침내 '환희 담배'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로 이름으로 놀림을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가끔 나를 알고 있는 친구 녀석이 장난삼아 내 별명을 부르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환희 담배' 

정수라 6집 앨범 표지
 정수라 6집 앨범 표지

80년대 내가 제일 좋아했던 가수(정수라)가 앨범(6집)을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는 앨범 수록곡 중 '환희' 노래였다. '환희' 노래는 발라드 곡으로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내 이름 '환희' 노래는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고 노래를 따라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대학 학과의 응원가도 '환희'였다. 그것이 음치인 나를 힘들게 할 줄 몰랐다.

사실 음치인 내가 제일 싫어하고 두려운 것이 있다.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는 것'. 그래서 늘 친구들과 모임이나 회식을 있을 때는 거의 1차만 참석했고 노래 부르는 것이 두려워 2차에 참석해 본 적은 거의 없다.

한번은 1차 회식이 끝난 뒤, 친구들에 의해 2차 노래방으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내 노래를 꼭 들어봐야 한다며 우격다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며 발버둥을 쳤으나 워낙 완강하여 거절할 수가 없었다.

노래방에 들어서자, 친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환희' 노래를 선곡으로 틀어놓고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반주와 함께 가사가 나오자, 친구들은 박수치며 노래 부를 것을 계속해서 주문했다.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솔직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노래를 불렀으나 친구들은 내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친구들의 그 웃음이 마치 나에게는 빈정거림으로 들렸다. 결국, 나는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노래방을 박차고 나왔다. 노래방을 뛰쳐나왔지만, 친구들이 나를 비웃는 듯한 그 웃음소리는 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어떤 경우에라도 노래방 가는 일이 결코 없었고 지금까지 내가 제일 좋아했던 가수를 미워하게 되었다. 단지 '환희'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말이다. 심지어 TV에 그 가수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고, 라디오에 '환희' 노래가 나오면 라디오를 아예 꺼버리기까지 했다.

돌이켜 보면, 그깟 이름이 뭐길래가 아니라 그깟 이름 때문에 울고 웃었던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름이 운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야 느끼는 바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사람 따라간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결국 그 이름도 흥(興)하고 쇠(衰)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름은 그 사람의 행동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나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얼마나 많을까가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 창에 내 이름을 타자하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눈에 띈다. 그중에는 영화배우, 가수, 소설가, 교수, 판사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내 이름 '환희'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따라 '환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정감 가는 이유는 왜일까? 한편, 이 사람들이 이름 '환희' 때문에 경험했던 일이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름 때문에 생긴 일 공모'



태그:#환희 담배, #정수라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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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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