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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육 목사
 최태육 목사
ⓒ 최태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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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육 목사는 지난 196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 서대문구의 감리교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92년 1월부터 2000년 2월 말까지 강화군 교동면에서 목회를 하였다. 8년간 그곳에서 살다 보니 그는 주민들 간에 또 교인들 간에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 목사는 점차 한국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학살이 그가 목회하던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며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목회한 같은 교회 안에서 한국전쟁 중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원수지간으로 함께 "싸늘하게"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던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화해와 사랑을 말하는 교회 안에서 민간인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웃으로 함께 살며 같은 교회를 나가면서 끝없이 분열과 갈등을 반복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목격했다.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지난 2007년 그는 목회를 접고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에 들어가 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민간인학살의 참상을 더욱 심층적이고 체계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지난 2015년 <남북분단과 6·25전쟁 시기(1945-1953) 민간인집단희생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연구>로 목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그는 해방정국과 6·25전쟁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집단희생 사건과 한국기독교가 어떻게 관계되었는지 연구했다. 또 남북분단과 6·25전쟁 시기 민간인학살에 가담한 기독교인들의 활동도 살펴보았다.

지난 4월말 최 목사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학살의 문화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수기>를 펴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이 민간인학살과 한국기독교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는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추적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한 목회자의 트라우마와 경험을 10년간 고뇌하면서 성찰적으로 되새긴 글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또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에 대해서 숙고하고 음미하며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의 말처럼 "생각하는 씨알(인간)이라야 산다." 최태육 목사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책표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책표지
ⓒ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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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인학살의 피해자 및 가해자 그리고 유족 4백여 명에게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서 잊히지 않는 가슴 아픈 사연 몇 개를 소개하면?
"학살을 조사하는 분들은 모두 경험하는 일이지만 나도 적지 않은 살해 방법을 들었다. 부하를 시켜 친구의 머리를 호박돌로 쳐서 깨뜨려 살해하는 것, 쇠스랑으로 찍어 살해하는 것, 윤간 후 학살하는 것, 20여 명의 부녀자들을 죽창으로 쑤시고 난 후 총을 난사하여 학살하는 것, 칼빈과 M1으로 사람의 뒤통수를 쏘는 것, 총살 후 참나무로 머리를 깨뜨려 확인 살해하는 것, 경찰이 정신지체 장애인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 주민들을 총살시키는 것, 같은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참나무 몽둥이로 패서 죽게 만드는 것, 어린 중학생이 사람들을 총살한 것, 한 살배기 어린이를 학살하는 것, 9살 어린이를 지향사격으로 총살하는 것.

30여 명의 주민에게 기관총으로 난사한 후 꿈틀거리자 수류탄을 투척하여 폭사시키는 것,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며칠 전에 친척을 죽이고 사흘 전에 사촌을 죽이고 이틀 전에 아내를 죽이고 하루 전에 아들을 죽이는 것, 계선주(배를 매어 두기 위해 계선안이나 부두 등에 세워 놓는 기둥)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사격 연습하듯 총을 쏴서 살해하는 것, 자기가 총살한 사람의 피를 손가락으로 만지며 빨갱이 피를 봐라 소리 지르는 것, 얼굴에 6발의 권총을 쏘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것, 중학생이 사람을 총살하고 친구에게 자랑하는 것, 100여 구의 시신을 불로 태우는 것 ….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라는 생각과 함께 학살을 경험한 세대는 인간에 대한 신뢰 자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생존한 여인을 다시 학살한 사건이다. 여인은 원북면 반계리 솜틀다리 학살 현장에서 생존하여 200여 미터를 기어가고 있었다. 그때 경찰과 치안대원이 다가와서 그냥 총 두 방을 쏘고 갔다. 마치 기계처럼…. 두 청년에게 총에 맞아 신음하는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도 아니었다. 그냥 제거해야 할 무생물, 빨갱이였다. 아무 느낌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충남 태안군 민간인학살을 조사하면서 주민들을 만났을 때 마치 "뾰족한 유리파편이 수 없이 박혀 있는 두터운 장벽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는데, 그 의미를 좀 더 풀어 밝히면?
"나는 지난 1992년 1월부터 2000년 2월 말까지 강화군 교동면에서 목회를 하였다. 8년간 그곳에서 살다 보니 주민들 간에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리파편이 박힌 두꺼운 마음의 장벽을 치고 서로 적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태안 소원면 모항리 주민들을 만나 학살사건을 물었을 때, 교동 주민들과 같은 반응을 하였다. 유리파편이 박힌 장벽은 학살로 생긴 상처와 불신, 그리고 적대 문화를 의미한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지?'

 찔레꽃나무로 뒤덮힌 민간인학살 무덤
 찔레꽃나무로 뒤덮힌 민간인학살 무덤
ⓒ 최태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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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화해위원회 근무 당시 <서산·태안부역혐의희생사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사건의 존재여부와 경과, 진실위의 입장을 담은 것에 불과하였고 정작 중요한 무엇인가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했는데, 그 "정작 중요한 규명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진실화해위원회의 사건조사와 결정은 기본적으로 신청사건에 국한되어 있다. 그것도 진실규명 대상자가 희생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경찰이나 검찰이 사건을 조사하듯 그렇게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학살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사건규명을 위해 질문을 하면 유족은 물론 가해자들도 다른 각도에서 답을 한다. 가해자들은 '애매한 사람 많이 죽었어. 억울한 사람 많아.' 피해자들이나 목격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지?' 이런 생각을 깔고 답을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사건규명과 다른 각에서 답변을 하는 것이다.

학살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학살로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치유해달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사건을 규명하고, 현재까지 존재하는 학살의 문화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치유의 관점에서 조사되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진실규명은 더욱 철저하고 명백해야 한다. 그 해결책도 치유와 화해를 위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 현재는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의(아래 한통역)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한통역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한통역(사)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 연구원과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여 만든 독특한 단체다. 이 단체는 통일 이후 서로 갈등하던 두 집단이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전쟁과 학살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하고 있고, 통일운동에 매진한 분들로부터 지혜를 얻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료수집, 정리에 열중하고 있다."

58년 동안 가해자와 이웃집에서 살았던 할아버지

 한 여인이 학살되었던 학살지(사진 아래 왼쪽)
 한 여인이 학살되었던 학살지(사진 아래 왼쪽)
ⓒ 최태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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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이 현재 한반도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지? 또한 민간인학살의 문제가 단지 한국전쟁기의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의 역사라고 보는지?
"먼저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불신과 적대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전쟁 전후 학살은 현재에도 진행되는 역사라고 생각한다. 매주 열리는 태극기 집회는 이를 상징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지난 2008년 6월 서산태안 조사가 거의 마감될 때 고북면의 한 집에서 80대의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50여 미터 거리의 밭 가운데 있는 집을 가리키며 58년 전 3~4명의 치안대원이 집을 나서는 삼촌에게 말을 거는 모습, 줄로 삼촌의 손을 묶는 모습, 논 아래로 끌려가는 모습, 다음 날 발견한 삼촌의 시신 모습을 증언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길 위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야! 그는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 아버지와 삼촌을 체포한 사람이 이 윗집사람이야!"

그렇게 할아버지는 58년 동안 가해자와 이웃집에서 살았다. 서산 고북면, 해미읍, 지곡면, 팔봉면, 태안 태안읍, 고남면, 안면읍, 남면, 원북면, 이원면, 근흥면, 소원면 모든 마을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부역혐의학살 사건의 특징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수십 년 동안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것 말이다. 이웃 간의 불신과 적대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군검경 합도수사본부는 부역자심사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고, 치안국장은 전국 경찰서와 지서를 통해 마을마다 심사위원회를 조직·운영했다. 지서장과 읍·면의 민간인들로 조직된 심사위원회는 사람들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구별하였다. 국가권력이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주민들을 학살에 가담시킨 것이다. 갈등과 적대를 조장한 것이다.

이처럼 전쟁세대는 권력과 기득권세력이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국민과 이웃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이 어떻게 국가와 이웃을 신뢰하겠나? 전쟁세대가 후대에 무엇을 '유전'하였겠나?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권력과 기득권세력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진영에 편입하여 이를 찬성하지 않는 개인과 집단을 배타하고, 꺾고, 이기는 것이 아니겠나. 그 결과 국가권력, 기업, 사회단체, 종교단체 등 이 사회의 모든 곳에 배타적 경계와 적대적 프레임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 책에 2살이나 10살 미만의 다수 어린아이들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떻게 어른들이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2살이나 10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조차 학살하게 되는 이런 기막힌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나?
"강화 교동 인사리 인현동의 아이들은 지향사격으로 총살당했다는 증언은 거의 없다. 다만 부모와 가족들이 처형되는 날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학살되었다는 증언은 많다. 그런데 고구리 독고개 낭아래에서 학살된 최고유(9세) 어린이에 대한 증언은 최소 7명이 넘는다. 목격자도 있다. 그는 교동 해군특공대에게 정식으로 체포되었고,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았고, 처형될 자로 분류되었고, 독고개 낭아래 해안에서 특공대원의 지향사격으로 학살되었다.

최고유의 학살 원인은 두 가지다. 그가 친구들에게 으스대기 위해 할아버지 학갑(벽장)에 권총이 있다는 거짓말을 한 것과 아버지가 월북하였다는 것이다. 이게 학살의 원인이 될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아니다. 그러나 당시는 상식보다 생존과 안전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는 전쟁시기였다. 그래서 이런 학살은 월남한 유격대의 안전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초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인 가해자로서 학살에 가담했다"

 빨갛게 피로 물들었던 집단학살지
 빨갛게 피로 물들었던 집단학살지
ⓒ 최태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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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목사의 입장에서 학살의 피해자들이 철천지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학살의 가해자까지 용서, 사랑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보나?
"나는 이것이 피해자 입장에서는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유족들이 경험한 상처가 치유되고 학살로 인해 발생한 병리적 현상이 밝혀지고 고쳐지면 그때 용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 중에 68년 전 유족들이 경험한 학살에 대해 아는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될까? 이른바 '순교 논리'로 학살 사건을 대체하기 급급한 기독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말한다?

대구10.1사건, 제주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인 가해자로서 학살에 가담했다. 그런데 자기가 저지른 범죄는 꼭꼭 숨기고, 68년 동안 일관되게 '순교논리'를 앞세워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한 기독교가 무슨 용서를 말할 수 있나? 기독교는 학살에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범죄자 중에 하나다. 나도 기독교인이다. 내가 무슨 낯으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하라 말라하나? 그저 잘못했다고 빌고 회개할 뿐이다.
  
- 오늘 한국에 사는 우리들이 이제 민간인 학살의 문화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보는지?
"태극기 집회를 보면서 여전히 학살이 배태한 적대문화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삼성의 노조탄압과 무노조 관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기총과 이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의 북한적대 신념과 기독교 저변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순교론도 마찬가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남한의 사회, 경제, 종교·문화에 걸쳐 적대문화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학살의 문화가 오늘 현실에 유전되었다고 본다.    

원수와 함께 예배를 드린 할머니

- 목회자가 '전공'도 아닌 민간인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천착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학살이 교회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화해, 사랑을 말하는 교회 안에서 끝없이 분열과 갈등이 반복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이었던 황씨 할머니가 지난 1998년인가 1999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장로님, 교인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힘껏 찬송하시던 분이 일순간 몸을 돌렸다. 싸늘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전쟁 당시 학살되었는데 당시 남편을 체포할 때 참여했던 분이 그 예배시간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원수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나는 당시 이런 사실들을 몰랐다. 그래서 이 길로 접어들었다."

- 민간인학살의 가해자들도 자녀나 부모형제를 둔 인간들인데 어떻게 같은 인간이자 동포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다고 보는지?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학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폭력의 기원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제인 구달, 와스보, 존 도커, 얀 아스만, 많은 사람들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들은 1900년대 발생한 학살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그들의 사회·종교·문화를 근본적으로 다시 살펴보고 있었다. 특히 얀 아스만은 종교·문화의 구별 짓기, 제인 구달은 인류의 과거가 가지고 있던 폭력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두 사람은 인류사회와 종교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인류사회가 폭력과 이를 정당화하는 구별 짓기를 통해 발전했다고 보았다. 그 중심에 '생존'과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기득권'이 존재했다. 개인과 집단(가족, 국가, 체제)은 자신의 생존과 이를 보장하는 기득권이 불안하거나 붕괴될 때 타자를 형성하고, 이를 부정·배제·제거함으로 자신의 생존을 추구한다.

인류의 탄생부터 그랬고, 종교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 타자부정을 통한 자기 생존이라는 것이 인류의 매우 오래된 생존방식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만큼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역사는 개인·집단의 생존과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인류는 참혹할 정도로 잔인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 지난 10여 년 동안 민간인학살 문제를 연구하고 조사하면서 목사님이 느낀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나?
"현재 진행형인데 역시 불신과 적대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생존과 기득권수호가 곧바로 경쟁과 적대로 이어지는 문화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학살이 과거에 한 번 발생한 사건이라면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살의 원인이 되었던 불신과 적대가 그대로 현 사회에 유전된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 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힘이 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 학살의 문화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수기

최태육 지음, 작가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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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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