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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대선 전야, 양 김의 단일화가 무산돼 가는 순간, 재야 상층부에서도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재야의 양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익환 목사와 박형규 목사도 이대로 가면 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분이 의논한 것은 아니지만, 이심전심으로 자신과 가까운 후보를 사퇴시켜서라도 단일화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재야의 막판 단일화 노력

 1987년 11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후보단일화 쟁취대회’.
 1987년 11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후보단일화 쟁취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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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가까운 박형규 목사가 먼저 나섰다. 박 목사는 어느 날 재야 정치인 한 사람으로부터 김대중이 양보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졌다는 얘기를 전달받았다. 그래서 박 목사는 곧 김영삼을 만나 '두 사람이 다 나오면 반드시 패배한다. 민주화를 염원해온 국민을 생각해서 나이가 젊은 김 총재가 양보하라. 다음번엔 김 총재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라고 설득하며 사퇴를 권고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김대중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면서 시간을 좀 주면 주변 사람들과 상의해 본 다음 결정하겠다고 하면서 즉답을 피했다.

문익환 목사도 대통령 선거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어느 날 절친한 후배이면서 김대중의 열렬한 지지자인 고영근 목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형님, 김대중 씨를 사퇴시킵시다. 이 대로 가면 노태우가 당선되겠습니다."라며 자신이 들은 유력한 정보를 전했다.
문익환 목사는 그날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김대중을 열렬히 지지하는 호남 민중들의 모습이 떠올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선거 막판에 김대중에게 의사를 전달할 기회가 한번 왔다. 선거 이틀 전에 김대중을 지지하는 재야 원로들과 선거운동본부 핵심 참모들이 동교동에서 회동했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대책을 협의하는 자리였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김대중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김대중이 사퇴해서라도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 노력도 김대중 필승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대통령 선거 투표일에 임박해 후보 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 시도됐다.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13개 단체와 백기완 선거본부의 제안으로 12월 9일 후보 단일화를 위한 비상정치협상이 제안됐다.

이에 따라 백기완이 10일에 김영삼과, 11일에 김대중과 회동을 가졌다. 그러나 김대중은 백기완의 노력을 자신에 대한 후보 사퇴 압력으로 인식하고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래서 백기완은 12월 12일 자신의 민주 연립정부 제안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후보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것으로 재야세력의 막판 단일화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됐고, 오직 선거 결과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독자후보론의 후보 백기완은 1987년 1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각각 김영삼(위)과 김대중(아래)을 만나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대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독자후보론의 후보 백기완은 1987년 1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각각 김영삼(위)과 김대중(아래)을 만나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대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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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 패배

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던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선거 전날인 12월 15일,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가 압송돼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안보 심리를 자극하는 의도적인 일정이었다.

6월항쟁 이후 오로지 민주정부 수립으로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왔고, 선거승리를 확신했던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나름 선거승리를 예측하고 있었던 노태우 후보 측이 승리에 쐐기를 박는 마지막 정치쇼였다.

민청련 회원들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조직의 결정에 따라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12월 16일 역사적인 17대 대통령선거 날을 맞았다. 김희택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간부들은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사무실에 나와 언론에서 전하는 투표상황을 보면서 선거결과를 지켜보았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는 선거대책 상황실이 마련돼 투표소 상황을 시시각각 체크했고, 그 옆의 공정선거감시단 사무실에는 20여 대의 컴퓨터를 설치하고 전국의 개표상황을 별도로 집계하기 위해 20여 명의 실무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국본에 파견돼 총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권형택 부의장도 국본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상황을 체크했다.

민청련 지역지부 회원들은 국본 공정선거감시단 지역지부에 소속돼 자기 지역 투개표 감시활동에 참가했다. 그런데 16일 오후 서울시 구로구청 투표소에서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부정투표함으로 의심되는 투표함이 발견돼 시민들이 투표함을 확보하고 집단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즉시 실무자를 보내 상황파악에 나섰고, 국본 상황실에서도 구로구청 항의 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 투표소에 나가 있는 공정선거감시단원들을 구로구청으로 보냈다.

 (위) 구로구청에서 농성중인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 (아래) 문제의 구로을 미개봉 부재자 투표함으로 1993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구로선관위에서 어디론가 옮겨가고 있는 모습. 이 투표함은 29년 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끝에 2016년 7월 22일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의해 개봉됐다. 결과는 4325표 중 노태우 3133, 김대중 575, 김영삼 404, 김종필 130 등으로 발표됐다.
 (위) 구로구청에서 농성중인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 (아래) 문제의 구로을 미개봉 부재자 투표함으로 1993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구로선관위에서 어디론가 옮겨가고 있는 모습. 이 투표함은 29년 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끝에 2016년 7월 22일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의해 개봉됐다. 결과는 4325표 중 노태우 3133, 김대중 575, 김영삼 404, 김종필 130 등으로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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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어수선한 속에서 투표가 종료되고, 8시쯤부터 전국적으로 개표가 진행됐다. 밤새워 개표가 진행된 결과 12월 17일 새벽에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6%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가 28.0%를 얻어 2위,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27.1%를 얻어 3위에 그쳤다.

6월항쟁에서 국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대통령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어이없게도 민주세력이 패배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광범한 관권 선거 개입이 있었고, 일부 투표소에서 부정 투·개표 사례들이 발견되긴 했으나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역시 양 김의 단일화 실패가 결정적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6월항쟁으로 타올랐던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급격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시민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구로구청 사건과 김병곤의 결단

모두가 패배감에 젖어 좌절하던 그 순간, 꺼져가는 투쟁의 불씨를 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쓴 이가 있었다. 김병곤이었다.

12월 17일 아침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침통한 분위기의 국본 사무실에 김대중 후보가 밤샘으로 핼쑥한 한 얼굴로 참모들과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광범한 관권, 금권 선거를 규탄하면서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이때 구로구청 사건이 큰 사건으로 떠올랐다. 당시 구로구청에는 시민 수백 명이 부정투표함으로 의심되는 투표함을 점거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었다. 오후 들어서면서부터 구로구청에는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은 구청 앞마당에서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었다.

민청련과 민통련 회원들도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민청련에서는 김병곤 부의장을 현장 책임자로 파견했고, 해당 지역의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과 주로 남민청 회원들이 농성대열에 합류했다.

사실 김병곤은 대통령선거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치러졌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선에서 민통련 상황실장을 맡았던 그는 선거 막판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선거 당일에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돕기 위해 차량을 여러 대 구해 부정선거 고발 현장을 쫓아다니는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서울본부의 김희선 본부장으로부터 구로구청 사건 연락을 받은 그는 즉각 구로구청으로 가서 점거한 시민들과도 합류했다. 재야단체의 간부로서, 농성자 중 가장 연배가 높은 선배로서, 그는 마다치 않고 구로구청 투쟁의 지도자로 나섰다.

진압경찰의 진입이 예상되는 17일 저녁, 민통련에서는 문익환 의장과 임채정 사무처장이 구로구청으로 찾아가서 김병곤에게 현장에서 나올 것을 권유했다. 김병곤인들 왜 나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민청련 사건으로 2년여 감옥생활을 한 후 겨우 5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갈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로구청 상황은 그가 없으면 싸움을 지휘하기 어려웠고, 그 사실을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병곤은 그곳을 나올 것을 권하는 임채정에게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구로구청 사건을 접하고 구로구청으로 향하는 (왼쪽부터) 이해찬 민통련 기획실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임채정 민통련 사무처장
 구로구청 사건을 접하고 구로구청으로 향하는 (왼쪽부터) 이해찬 민통련 기획실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임채정 민통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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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밤, 경찰 진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 민청련에서 김희택 의장과 권형택 부의장이 김병곤을 구로구청 농성장으로 찾아갔다. 김 의장은 김병곤에게 이제 본인의 역할은 충분히 다 했으니 농성장에서 철수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이미 농성 시민 학생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김병곤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병곤은 민청련에서 더는 희생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근우 남민청위원장을 불러 회원들과 함께 철수할 것을 종용하여 구청을 나가게 했다.

2박 3일의 구로구청 부정선거규탄 투쟁은 12월 18일 새벽 쇠파이프와 각목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김병곤 등 지도부들은 엄청난 구타 속에서 1천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체포돼 김병곤, 김희선 등 184명이 구속됐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서울대 학생 양원태가 구청 옥상에서 추락해 척추 골절상을 입고 하반신 불구가 되는 부상을 입었다.

선거무효투쟁과 김병곤의 희생

민청련에서는 12월 22일자 <민중신문> 47호를 발행해 구로구청 투쟁을 상세히 보도함과 동시에 '민주를 짓밟은 상상 못 할 부정·조작 – 부정선거는 이렇게 자행되었다'라는 제목으로 부정선거 사례를 유형별로 분석, 보도했다.

그러면서 '선거무효투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이후 '학살범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선거무효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를 보였다. 그리고 18일 밤부터 명동성당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 농성투쟁에 지지를 보냈다.

또한 민청련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학생불교연합회, KSCF, EYC 등과 연대해 23일 오후 4시 명동성당에서 '부정선거 규탄·선거무효화 및 군사독재 즉각 퇴진 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구로구청 부정선거 문제는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고, 선거무효투쟁도 지속되지 못했다. 많은 국민들이 양 김 분열로 민주화운동 진영이 패배했다고 보는 상황에서 구로구청 부정선거 문제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기 어려웠다.

구로구청사건은 법정에서 부정투표함 여부를 놓고 진실공방은 있었지만 가려지지 않았고, 결국 김병곤은 폭력 및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6번째 징역을 영등포 교도소에서 살게 된다.

김병곤은 수감 중 1988년 2월부터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중병을 감지했다. 그로부터 4달 후인 6월에 2차례 정밀진단을 받고 위암 3기로 판정됐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김병곤은 자신의 위암에 대해서 두 가지 원인을 짚었다. 첫째는 1987년 대선 때에서의 분열이 자신한테 준 충격, 둘째는 1987년 여름 출옥 이후 몸을 돌보지 못한 채 무리한 활동을 한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대선과정에서의 운동세력의 분열이 가져온 정신적 충격이 가장 컸을 것이다.

180cm가 넘는 키에 기골이 장대한 투사 김병곤도 혼자 진 시대의 짐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가. 끝내 위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1990년 12월 6일, 마흔을 못 넘긴 37살 젊은이 김병곤은 우리 곁을 떠났다.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1988년 4월 28일 항소심 재판정에 들어가는 모습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1988년 4월 28일 항소심 재판정에 들어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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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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