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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타계한 재중동포 독립운동가 김학철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도구로 삼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에 대해 원산총파업과 미야케 경성제국대 교수를 꼽았다. 김학철은 1929년 일어났던 원산총파업에서 일본인 선원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조선인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일지라도 대자본에 대항하는 같은 노동자라는 인식을 처음 가졌다고 한다.

또 일본인 소유 공장에 들어가 파업을 주도하고,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해 일경에 쫓기게 된 이재유를 숨겨준 이가 같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미야케라는 신문 보도를 보고 일본인이 모두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경제학자이자 경성제국대(현 서울대) 교수였던 미야케는 자기 집에 토굴을 파고 이재유를 숨겨준 죄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조선 독립운동, 넓은 의미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든 이는 조선인만이 아니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국가보훈처 통계에 따르면, 한국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포상을 받은 외국인은 총 69명(2017년 말 기준)이다. 전체 서훈자 1만 4830명 중 약 0.5%다. 이들은 국적별로 ▲ 중국 33명 ▲ 미국 21명 ▲ 영국 6명 ▲ 캐나다 5명 ▲ 아일랜드 2명 ▲ 프랑스 1명 ▲ 일본 1명으로 집계됐다.

한국 독립운동에 함께 뛰어든 일본인들

이소가야 스에지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이소가야 스에지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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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장제스 총통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우리를 도왔다. 서훈자 통계에도 이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비록 공식 서훈자는 1명이지만 일본인들도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변은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서훈자 명단에) 소련과 공산당계 중국인, 일본인이 대거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어떻게 보면 가장 많이 도와준 이들이 일본인들"이라고 평가했다. 변은진 교수는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살았던 조선인이 200만 명이나 된다. 이런 (독립운동을 도왔던) 그룹들이 일본 내에 많이 있다"며 "일제시대에 도와준 이들이 현재까지 재일조선인 사회를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처벌했다. 변은진 교수에 따르면 1925~1942년 사이 조선 내에서 치안유지법, 내란죄, 소요죄, 신문지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일본인은 총 18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하급 사무원, 고원(관청의 임시직), 점원, 육체 노동자, 학생, 노동운동가 등으로 77만 명(1945년 기준)에 이르는 재조 일본인 중 하층계급에 속했다. 이들은 반전·반제·반자본을 목표로 조선인과 연대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한국정부로부터 지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유일한 일본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있다. 그는 의열단원 김지섭, 박열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소작쟁의 사건 등에서 조선인을 변론을 했다.   

인권변호사·대중운동가로 유명한 후루야 사다오도 있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 하의도(고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소작쟁의 재판 등의 변론을 맡았다. 교육자로서 3.1운동과 한국 독립을 지지한 요시노 사쿠조도 있다. 

노동운동가 아사히 겐즈이는 하의도 농민들을 도와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를 지원했고, 일본농민조합 하의지부를 결성했다. 1908년에 있었던 하의도 소작료 재판 당시 항소심 승소를 끌어낸 이도 일본인 변호사 고노 부쓰노스케였다. 여러 차례 보훈처 서훈 심사에서 탈락한 가네코 후미코도 남편 박열, 조선인 아나키스트들과 불령사를 조직했다. 가네코는 황태자 암살 대역죄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변은진 교수는 "1930년대는 일본이 급속히 우경화되는 시기다. 15년 전쟁(1931~1945)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일본 내 사상조직이 엄청난 전향공작으로 인해 다 와해되고 지하화된다"면서 "그러면서 사회주의 계열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내에서 조선공산당 적색노조 같은 그룹들이 전국에서 전시기 동안 맹렬히 일어났다. 일본인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향공작의 영향도 분명히 존재했다. 변 교수는 "판결이 나기 전에 전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전향서를 쓰면 풀려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불령선인' 도왔다는 죄로 9년 넘게 복역한 이소가야 스에지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고 9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만기 출소한 일본인이 있다. 그가 바로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8)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된 재조 일본인 중 '최장' 수감기록이다. 치안유지법의 형량이 평균 3년 내외인 것에 비하면 그는 6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만큼 불령선인(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에게 동조한 죄가 컸다. 이후에도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면서 총 9년이 넘는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일제는 그를 두고 '조선의 60만 내지인 중 유일한 비국민'이라고 비난했다.

이소가야 스에지는 1907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10여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21세 때인 1928년 일본 육군에 입대했다. 같은해 조선으로 건너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19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일제는 재조 일본인의 숫자를 늘리는 정책을 썼다. 가문을 승계하지 않는 차남 이 분가하면서 조선으로 건너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942년께의 흥남질소비료공장. 현재는 함남 함흥시 흥남구역에 위치해 있다.
 1942년께의 흥남질소비료공장. 현재는 함남 함흥시 흥남구역에 위치해 있다.
ⓒ unident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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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인 1930년 이소가야는 제대를 하고,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질, 현 칫소)가 세운 흥남질소비료공장(아래 흥남공장, 박스 기사 참고)에 들어갔다. 흥남공장은 일질의 소유주 노구치 재벌이 1927년 자본금 1000만 엔을 투자해 함남 흥남에 설립한 황산암모늄 비료 및 화약(다이너마이트) 생산 공장이었다. 건설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장이었다. 남한에선 <국제시장>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의 조부가 이 흥남공장을 다녔고, 문재인 대통령 부친이 흥남시청 비료계장으로 근무하면서 서로 알고 지냈던 인연이 영화 개봉 당시 화제가 됐다.

이소가야는 원래 과수원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꿈꾸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일본의 부모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흥남공장에 취직해서 조선에 정착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5년 할부로 과수원도 구입했다. 그랬던 이소가야가 흥남 구룡리의 손일룡 집에서 하숙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손일룡의 집은 조선 사람들이 드나드는 아지트였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당시 경성이 남쪽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면, 북쪽에선 함남 함흥이 공산주의의 아성이었다고 한다. 바로 흥남공장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흥남공장의 노동환경에 대해 이소가야는 <우리 청춘의 조선>(1984·국내 출판 1988)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하루종일 고막이 터질 듯이 쾅쾅대는 광삭분쇄기와 자욱한 분진, 용광로 속의 타고 남은 찌꺼기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 등등. 그곳에서는 유산이 주르르 떨어지는 작업복을 입고 7~8겹으로 접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가 주야 3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이소가야는 어느 날, "이야기를 하러 오지 않겠냐"는 손일룡의 권유를 받았다. 이렇게 주인규·선규 형제, 송성관 등 후에 '흥남좌익그룹'이라고 명명될 혁명적 노동조합의 주도세력과 만나게 됐다. 그는 같은 일본인에게도 멸시받는 재조 일인 최하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동질감과 공감을 느꼈다.

이소가야는 그들에게서 식민지배의 실태, 조선이 일본 때문에 져야만 하는 가혹한 희생, 부조리하게 강요된 처참한 운명을 듣게 되고 어떻게 희망을 모색하고 이상을 추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과거의 인생과 결별하고 투쟁에 참가할 결의를 다지게 된다. 그는  <우리 청춘의 조선>에서 이 시기 이후 자신의 삶을 "다시 태어난 삶"이라고 규정했다. 1931년 6월 결성된 흥남좌익그룹은 김원묵을 지도자로 삼고, 공장 안에 조선인부(책임 송성관), 일본인부(책임 이소가야), 자유노동자부(주선규)를 설치했다. 흥남좌익 일본인부에 속한 일본인은 마에다 긴사쿠를 비롯한 5명이었다.

이들은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발행하고 공장 내 '조합반'을 조직해 이를 바탕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흥남좌익은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투쟁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발각됐다. 이로 인해 500여 명이 검거됐다. 이것이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태로 사건)'이다.

이소가야는 투옥된 이후에도 함흥감옥에서 '조선혁명'에 대한 토론과 학습을 하면서 자신을 단련시켜 나갔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검거 이후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는 점이다. 같이 활동했던 주인규는 이소가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이 붙잡혀 형무소에 갈 때 그곳에서 서로 통방하는 방법을 정해두세. 어디선가 '똥 먹어라'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은 내가 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그리고 자네도 '똥 먹어라'고 소리치게. 그러면 나는 이소가야가 건강한 몸으로 잘 있다는 걸로 알겠네."

주인규는 흥남의 부유한 지주 아들로, 원래 영화배우였다. 그는 나운규가 연출·주연한 <아리랑>(1926)에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청지기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미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악역' 전문 배우로 이름이 높았다. 주인규는 본래 공산주의자였는데, 크게 흥행했던 <아리랑> 이후 출연한 영화들이 연달아 실패하자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와 흥남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그도 이소가야처럼 전향을 거부하고 4년간의 옥살이를 견뎠다. 주인규는 해방 후 북한정권에서 초대 국립영화촬영소장이 됐으나 1956년 일어난 '8월 종파사건'에 연루돼 고문받던 중 자살했다.

"조선인 동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일본으로 귀국했다"

비록 흥남좌익은 1년 여의 짧은 활동에 그쳤지만, 이후에도 흥남공장에선 1930년대 내내 노동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노조운동에 참여하며 성장한 노동자들은 활동경험을 토대로 해방 이후 신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소가야의 동료들도 해방 후 조선노동당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김일성 휘하의 만주 항일 빨치산 (만주파) 출신이 핵심권력으로 부상하면서 철저히 배제, 숙청당했다.     

한편 이소가야는 1941년까지 9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마치고 함흥형무소를 출옥했다. 그는이후 북선제강소, 함흥합동목재주식회사 장진강제재소 등에서 근무했다. 그 사이 임충석 등과 교류하면서 일제 패망에 대비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함흥시당부 일본인부에서 활동하면서 함흥일본인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그는 이를 두고 "전후 처음으로 공산당원이 돼봤다"고 말했다. 이소가야는 소련과 협상해 일본인의 귀환을 책임졌고, 1947년 마지막 일본인 그룹이었던 엔지니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난 1988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소가야 스에지의 회고록 <우리 청춘의 조선> 표지.
 지난 1988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소가야 스에지의 회고록 <우리 청춘의 조선> 표지.
ⓒ 책 표지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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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부터 쓴 일기에 따르면 그는 "조선인 동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후 초등학교 소사로 일하면서 감옥생활, 종전 귀환 체험 등 조선에서의 경험을 다수의 책으로 남겼다. 그는 북한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했지만 만날 수 없었고, 친구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숙청당했다. 그는 사망 때까지 북한을 방문하지 못했다. 이소가야는 비인간적인 독재에 실망을 느껴 반북주의로 돌아섰다.

변은진 교수는 "이소가야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대단한 휴머니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의 잘못을 정부에 끊임없이 진정했다"면서 "피해자 인식에만 갇혀 있지 않고 일본이 가해자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던 양심적인 일본인"이라고 평가했다. 이소가야 스에지는 1998년 91세의 나이로 도쿄에서 사망했다. 앞서 1991년 84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한을 방문했다. 이때 자신이 갇혀 있었던 서대문형무소를 55년 만에 찾아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거듭 말하고 싶다. 일본은 한민족에 대한 속죄를 죽은 자에 대해서도 행해야 한다고. -(중략)- 나 자신도 관련되어 있는 서대문형무소(그는 여기서 2년간 수형생활을 했다)에서 처형자의 위령을 위해, 또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는 기분으로 외무성에 진정을 계속할 생각이다. 하지만 내 힘이 미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뜻 있는 일본인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죽은 자는 말할 수 없다 해도>, 1992, 256쪽)

흥남질소비료공장은 어떤 곳? "현재도 북한의 자부심" 
흥남질소비료공장(아래 흥남공장)은 1930년대 전기·화학 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6·25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현재의 흥남공장은 전쟁 후 복구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질소비료(현 칫소, 이하 일질)는 일본 내 대자본 중 조선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한 기업이었다. 1942년께 한반도 전체 광공업 자산의 26%를 차지할 정도였다. 일질은 조선에서 14개 기업을 경영했는데, 그중 일명 '아오지' 탄광이라고 불린 조선인조석유㈜와 흥남공장이 유명하다.

특히 지난 2015년 활동을 종료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 지원위원회 조사 결과, 흥남공장은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강제징용을 기피하거나 징용지에서 탈출하다 붙잡힌 이들을 보냈던 곳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재해율이 높았던 것이다. 당시 흥남 사람들은 흥남공장을 가리켜 '살인공장'이라고 불렀다.

흥남공장은 사회문화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1932년 <조선일보>에 두 차례 연재됐던 이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은 가혹한 노동조건에 항의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파업을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작업 중 재해를 당해 죽고, 일경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장례식에 동료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작가 이북명 자신도 흥남공장의 노동자였다. 이북명은 함흥고보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나 흥남공장에 들어가 3년간 일하며 겪은 경험을 데뷔작 <질소비료공장>에 담아냈다.

같은 해엔 흥남공장을 배경으로 한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딱한 사람들>이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앞서 언급한 영화배우 주인규가 공장을 나와 연출을 맡은 황운 감독을 도왔다. 황운은 함흥 출신으로,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영화는 불합리한 해고를 당한 두 노동자의 사연을 다룬 것으로,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직공 1500명이 엑스트라로 동원될 정도로 대작이었다고 한다. <딱한 사람들>은 무성영화로 알려졌으나, 현재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함남 홍원군 출신의 안명철 NK워치 대표는 통화에서 "현재의 흥남공장(함흥시 흥남구역)은 전쟁 후 다시 복구한 것"이라며 "3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3교대로 근무 중이다. 북한사람들에겐 10만 명이 넘는 흥남 인구를 먹여 살리는 아시아 제일의 비료공장이라는 자부심이 크다"고 전했다.

실향민 출신의 김상헌(87) 북한인권정보센터 명예이사장도 기자에게 "학교를 가려고 종점에서 전차를 타면 차장 밖으로 흥남공장의 전경이 펼쳐졌다"면서 "그 장관이 15분 동안이나 계속될 정도로 큰 공장이었다"고 술회했다.   

[참고문헌]
변은진, <재조일본인 노동자 이소가야 스에지의 체험을 통해 본 8.15와 귀환>, 『아세아 연구』제60권 2호, 2017
곽건홍, <이소가야 스에지, 한일노동자연대의 개척자>, 『노동사회』 제32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999


태그:#흥남, #연대, #노조, #영화,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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