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씌어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된 소설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이 소설을 출간했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

<데미안>표지
 <데미안>표지
ⓒ 민음사

관련사진보기


이 소설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서두에 언급한 알과 세계, 그리고 압락사스라는 신이다. 데미안은 어린 시절 두 세계와 직면한다. 하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비롯되는 세계이다.

크로머를 만나기 전까지 싱클레어의 세계는 평화롭고 따뜻하기만 했지만, 크로머를 만난 뒤 싱클레어의 세계는 무너진다. 이때 그를 구원해준 것은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놀라운 혜안으로 싱클레어의 위기를 눈치채고 크로머의 마수로부터 그를 구원해준다. 이후 데미안은 아벨과 카인 이야기를 통해 싱클레어에게 새로운 세계를 일깨워준다.

데미안을 읽으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떠올랐다. 설국열차 속 꼬리 칸 사람들은 열차 앞 칸으로 건너가 윌 포드를 처단하고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만, 남궁민수만이 그와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

설국열차 속 모든 사람들은 열차라는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열차 밖은 죽음만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열차 앞 칸에 다다른 혁명군의 리더 커스티에게 윌 포드는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며 커스티를 유혹한다. 포드는 열차 속 생태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폐쇄적 생태계이므로,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커스티에게 열차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열차를 이끌라고 말이다. 그러나 남궁민수만은 열차 속이 아닌 열차 밖의 세계를 꿈꾼다. 크로놀(영화에 등장하는 미래의 마약, 환각제같은 것) 중독자였던 그는 사실, 크로놀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로 사용한 것이다.

설국열차가 지닌 메시지도 데미안과 같다. 열차라는 세계가 아닌 열차 밖의 세계, 기존 세상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라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에서 말하고 있는 알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은 아닐까? 인간은 사회를 벗어날 수 없고, 보편적인 틀과 통념,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벨과 카인 이야기에서 카인은 늘 악인으로 치부되지만, 데미안이 보여주는 새로운 해석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보편적 세계관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과 가치관, 기성세대에게서 전달되어온 이데올로기,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사회적 통념과 관습들은 모두 우리 세계를 제한한다. 어쩌면 사회라는 거대한 가상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인지도 모른다. 마치 매트릭스처럼, 인간은 보편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성찰하고 세계에 대한 의문을 품고 묻지만, 우리는 거대한 알에 둘러싸인 채 그것을 깨뜨리지 못한다. 결국 알이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만 아등바등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나 직업 등의 물질적 가치만이 으뜸이 되고 내면의 가치들은 등한시되기 쉽다. 그러는 사이 세계는 더욱 단단한 벽이 되어 보편적 삶의 가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럴수록 세계는 점차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며 작은 세계가 된다. 작은 알 속에서 그 작은 세계만이 전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스스로 생각해내려고 애써야 해, 그러고는 정말로 네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 그걸 하면 돼.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네가 네 자신을 찾아낼 수 없으면 다른 영(靈)들도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해"(157~158쪽)


꿈이 실종되고 상상이 실종된 사회다. 꿈을 이야기하면 비웃기 바쁘고, 상상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모두가 똑같은 세계만을 꿈꾼다. 작은 알의 세계만이 전부라 생각한다. 그것이 데미안을 통해 보여주는 우리 세계의 참모습은 아닐까? 싱클레어는 끊임없는 내면의 방황과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그러나 우리 세계는 불행하게도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누구든 한 번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누구든 고독의 혹독함을 조금은 느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걸 잘 견딜 수 없어 다시 밑으로 기어든다 하더라도."(165쪽)


싱클레어는 아벨과 카인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데미안의 세계를 거부한다. 데미안이 말한 이야기는 싱클레어에게 유년의 따뜻함을 거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데미안을 그리며 데미안을 찾게 된다. 누군가 데미안 같은 말을 한다면 우리는 싱클레어와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우리가 믿는 세계는 마치 종교와도 같다. 종교가 가르치는 절대적인 진리처럼 세상의 진리란 마치 고정되어 정해진 것이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소설은 압락사스라는 신을 통해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압락사스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모든 것이 공존하는 신이다.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175쪽)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나 그 운명마저 타인의 손에 기대거나, 타인이 정해준 대로 행하는 일이 우리 세계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진짜 꿈은 꼭꼭 숨긴 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알을 깨뜨리고 나갈 용기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꿈마저 제한되고,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가치는 결코 제한될 수 없다.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공포를 갖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을 가로막지만,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자들이 늘어야 세상은 더욱 진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꿈을 지닌 이들이 마음껏 활보하고, 마음껏 꿈꾸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의 알을 깨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 직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전쟁이 휩쓸고간 암울한 세상속에서 그 시대 모든 이들에게 '꿈'을 각인 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라는 철학적 모토가 담겨있다고 한다. 상징적 메시지들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데미안은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각인시킨다. 알이 아닌 그 바깥의 세계, 즉 내 내면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 말이다.

"당신이 믿지 않는 소망들에 몰두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아요. 그런 소망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온전히 올바르게 소망하든지요. 한번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성취를 확신하도록 그렇게 소망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성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소망하고, 다시 후회하고 그러면서 두렵지요. 그 모든 것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199쪽)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2000)


태그:#데미안, #헤르만헤세, #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상가 입니다. 블로그 "사소한 공상의 세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