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단막극이 다시 부활했다. 지난 4월 30일, 5월 1일에 걸쳐 방영된 SBS 드라마 <엑시트>에 대한 첫 소감이다. 지난 4월 24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와 오는 7일 첫선을 보일 월화 드라마 <기름진 멜로> 사이의 한 주, 그게 SBS 특집극에 허용된 시간이다. 4회 시청률 4.6%(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단막극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치다. 단막극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조촐한 시청률과 달리 <엑시트>는 그간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아니 다루기 버거웠던 '가상 현실'을 소재로 신선한 SF 장르물을 선보였다.

당신, 행복해지고 싶나요?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 SBS


4부작(보통 드라마라면 2부작) 드라마 <엑시트>를 연 건, 희망과 행복이라는 단어와 멀어 보이는 청년 사채 일수꾼 도강수(최태준 분)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가족 사진을 그는 가져갈 수 없었다. 아버지(우현 분)의 폭력에 못 견딘 어머니(남기애 분)가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라지자 대신 강수를 때렸다. 그에게는 그 시절 '폭력'의 흔적이 흉터로 남아있다. 술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웠을 리 만무했다. 결국 강수는 사채 일수꾼이 되어 황태복 사장(박호산 분)의 수하로 살아간다.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선영(전수진 분)은 황 사장의 애인이다. 도대체 그의 삶에서 '행복'의 기미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암울한 삶'을 살던 그의 눈 앞에 '당신... 행복해지고 싶나요?' 전단지가 보인다. 그 전단지를 들고 찾아가니, 그곳은 '가상 현실'을 이용해 행복한 삶을 제공해준다는 연구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도강수는 아버지에게 발목 잡힌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의 옆에 있고 이제는 건강마저 좋지 않다. 애증인지 연민인지 모를 감정의 도강수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위해 사 온 족발마저 외면당한다. 결국 다시 행복을 찾아 연구소로 향한 그 남자, 그러나 뜻밖에도 연구소는 행복해지기 위해 3억을 요구한다. 결국 모든 것이 '돈'이냐며 도강수는 발길을 돌린다.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 SBS


그렇게 <엑시트>는 '가상 현실'을 통해 행복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 가장 최악의 수를 던진다. 주사위의 그 어느 수가 나와도 늘 '행복'이랑은 거리가 먼 도강수의 삶, 경제적으로도, 가족도, 심지어 사랑도 그 어느 것하나 그에게 '행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현실의 삶 대신 '가상 현실의 행복'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처럼 보인다. 그렇게 가상 현실의 개연성을 부풀리던 드라마는 뜬금없이 그 '행복'을 위한 자금 3억을 요구하며 시청자를 의아하게 만든다. 그리고 드라마는 점점 '진짜 현실인지, 도강수의 가상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진행된다.

황태복의 돈을 빼돌린 채 도망치던 강수는 "제발 죽어버려"라고 외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차에 황태복이 치이고 강수의 소망은 이루어진다. 그제서야 '가상현실'의 행복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뀐 후 강수는 멋진 양복에 근사한 사무실, 널찍한 집 그리고 사랑하는 선영과 친절한 아버지와 함께 산다. 게다가 한 눈에 그를 알아보는 30년 만에 만난 어머니까지. 이 모든 상황은 그에게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실감하게 해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건가?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 SBS


알고 보니 그 '행복'을 선물한 건 아버지였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강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평생 행복을 느껴보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를 강수가 불쌍했던 아버지는 연구소로 찾아가 강수를 실험 대상으로 이용해달라고 부탁한다. 약물을 통해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 강수는 이적의 노래처럼 '말하는 대로' 행복해지는 삶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가상 현실의 행복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불행하기만 했던 삶, 비록 연구실 실험대 위에 누워 맛보는 가상의 행복이지만 강수는 그걸 선택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상행복'의 부작용으로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연구소를 찾아가 읍소한다. 연구소 직원은 강수가 실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강수의 의지뿐이라고 말한다.

진짜 딜레마는 행복을 만끽하던 가상 현실 속에서도 등장한다. 행복한 가상 속에 살면서도 순간순간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시달리던 강수, 그는 차츰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을 쫓던 황태복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걸 떠올린 강수는, 자신의 말 한디로 만남과 이별에 순응하는 선영의 태도까지 의심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맛보는 이 행복이 '인스턴트'라는 것을 자각하고 절망한다.

연구소에서는 약물을 더 투여했지만 강수는 여전히 혼란을 느낀다. 우재희(배해선 분) 박사는 '행복'을 멈추기로 결정한다. '행복한 상태'에서 깨어난 강수를 기다리는 것.

황태복과 그 수하들은 강수를 추격하고,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사랑하는 선영은 자신 따위 안중에도 없다. 결국 남은 건 강수의 선택이다. '개똥밭' 보다도 못한 암울한 현실인가. 그게 아니면 너의 곁에서 행복하다는 가족이 있는 가상 현실인가.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SBS 드라마 <엑시트>의 한 장면. ⓒ SBS


강수는 애원하는 가족들을 남긴 채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가상 현실의 엑시트(EXIT)'로 나온다. 그리고 드라마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그리워 하는 아버지를 찾는 강수의 꽉 닫힌 결말로 마무리 된다.

'가상 현실'이라는 SF 설정을 차용했지만, 보다 근원적인 '행복'에 대한 질문에 도달한다. 즉, '행복'이라고 하면 경제적이든, 관계에서든 모든 것이 충족되고 만족된 상태라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드라마는 질문을 던진다. '아프고 힘들 망정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역사, 당신이 부둥켜 안고 있는 그 질곡의 삶이 주는 진득한 감정이 진짜 행복은 아닐까'라고. 하지만 드라마가 도달한 명쾌한 결론에 시청자가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각자 아득한데 말이다. 외려 불안정한 가상 현실의 행복이 아쉽지 않을까.

가상현실이 주는 행복의 맛은 3월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도 슬럼가의 희망 없는 청년들은 가상 현실 '오아시스'를 탐닉했다. 영화가 '가상 현실'을 매개로 청년들의 진취적인 도전 용기를 북돋았다면, <엑시트>는 부자 간의 인정이라는 우리네 정서에 천착해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귀결시켰다. 영화 속 가상 현실은 극복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한 장치였다면, 드라마 속 가상 현실은 '부정해야 할' 문제적 장치였다. 성큼 다가온 '과학의 미래'에 대한 '온도 차'가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SBS특집 드라마- 엑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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