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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친환경적인 해변에만 부여되는 파일럿 블루플래그 인증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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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파일럿 블루플래그 인증, 신지 명사십리해수욕장

전국에 명사십리(明沙十里)라는 이름을 가진 해수욕장이 여러 곳이 있지만,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 해수욕장은 모래를 밟으면 우는 소리가 나서 속칭 '울모래등'이라 하는데 명사(明沙)가 아닌 명사(鳴沙)라 쓰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과 6촌 관계의 왕족 사대부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을 과감하게 비판한 경평군 이세보가 외척 세도일가의 전횡을 논하다가 이곳 신지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그는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유배의 설움과 울분을 실어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톱에 시를 쓰고 읊었다고 한다. 그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이 모래밭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 하여 명사십리(鳴沙十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전설도 전설이지만,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 해수욕장은 해수에 포함된 미네랄 등 기능성 성분이 전국에서 가장 풍부한 남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그 규모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매우 빼어난 곳이다. 또한 공기 비타민이라는 산소 음이온이 대도시의 50배에 이를 정도로 풍부하다.

고운모래와 깨끗한 바다, 아름다운 주변경관 등이 잘 어우러진 남해안 최고의 하계 휴양지로 2013년엔 전국 3대 우수해수욕장으로 선정됐고 2014년 소방방재청이 주관한 물놀이 안전명소로 전국 최고점수로 선정됐다.

2016년 6월 국내에서 유일하게 친환경적인 해변에만 부여되는 파일럿 블루플래그 인증을 획득했다. 파일럿 블루플래그란 글로벌 비영리단체 환경교육재단(FEE)이 해변과 마리나에 부여되는 국제 친환경 인증인 블루플래그 인증의 사전단계이며 해변의 수질과 안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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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항일운동기념탑에는 신지항일운동기념탑 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의 바치는 글과 함께 말년을 신지에서 기거한 1965년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에 피선된 후 일곱 차례나 회장을 역임한 한 시대를 풍미한 시나리오작가 최금동 선생의 헌시가 새겨져 있다.
 신지항일운동기념탑에는 신지항일운동기념탑 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의 바치는 글과 함께 말년을 신지에서 기거한 1965년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에 피선된 후 일곱 차례나 회장을 역임한 한 시대를 풍미한 시나리오작가 최금동 선생의 헌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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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불타오르는 항일의 투혼이여!, 신지항일운동기념탑

신지 대곡리에서 독계령을 가다보면 신지면민회관이 우측에 나오는데 이곳 구릉에 신지항일운동탑이 서 있다. 3·1독립만세운동을 전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신지 출신 임재갑·장석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 구국운동을 후세에 알려 자라는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시키고자 건립한 항일운동기념탑이다.

기념탑은 창공으로 힘차게 솟구치는 항일 톡립투사들의 드높은 기개를 상징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상징하는 양측날개로 구성돼 있다.

이 기념탑의 내력을 적은 현판에는 "1991년 신지면 출신 항일운동 선열들의 그 공적과 얼을 기리기 위해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 도민 하루한끼 굵기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아일보사와 공동건립키로 제휴, 경향 각지에 호소하여 건립비 일부를 확보하고, 1992년 우선 탑자지를 구입하고 설계 및 조형을 의뢰하였고, 1993년 11월 20일 기공식을, 1994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제막식을 거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기념탑에는 신지항일운동기념탑 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의 바치는 글과 함께 말년을 신지에서 기거한 1965년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에 피선된 후 일곱 차례나 회장을 역임한 한 시대를 풍미한 시나리오작가 최금동 선생의 헌시가 새겨져 있다.

2010년에는 항일운동기녑탑 주변에 신지항일운동기념공원이 준공됐으며, 총 1만 4282㎥ 부지에 기념자료관, 산책로, 체육공원 등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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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마칠 때까지 15년간 이광사가 머물렀던 유배지는 신지도 금곡리로, 당시 적거지가 그대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황토집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유배지로 가기 전 마을 앞에는 원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약 250여년 수령의 원교목(円嶠木)이 서 있다.
 생을 마칠 때까지 15년간 이광사가 머물렀던 유배지는 신지도 금곡리로, 당시 적거지가 그대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황토집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유배지로 가기 전 마을 앞에는 원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약 250여년 수령의 원교목(円嶠木)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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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진체의 완성자 이광사의 유적, 이광사 적거지와 원교목(円嶠木)

원교 이광사는 1705년에 태어나 1777년 신지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강화학파의 거두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 긍익에게 전수하였으며, 백하 윤순에게서 글씨를 배워 원교체라는 동국진체를 완성했다.

왕실의 후손으로 전성기를 누려던 원교의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영조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영조의 즉위로 노론정권이 수립되자 소론에 속한 백부와 부친이 모두 유배의 길에 올랐다. 원교가 23세 되던 해(1727년)에 유배지에서 돌아온 부친이 병사하고, 26세 되던 해에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백부마저 옥사하자 그는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51세(1755년) 되던 해에는 나주벽서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됐고, 국문까지 받게 되면서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에 부인 유씨가 먼저 목을 매달아 자결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함경도에 유배된 지 8년째인 영조 38년(1762)에 진도로 이배된 뒤 다시 신지도로 귀양을 오는 동안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부귀영화도, 가족도 이미 옛말이 된 뒤였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그를 위로해 준 것이 글씨였다. 원교에게 글씨는 생명이었다. 외롭고 고단할수록 붓을 잡아 글씨를 쓰고 또 쓰고, 다시 씀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도 얻었다. 서예가 없으면 원교도 없는 셈이었다.

글씨에 빠져든 원교에게 점이나 획, 글자의 짜임, 장법 등은 의미가 없었다. 글씨에 빠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서법의 한계를 떨쳐 버렸고, 이를 통해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성을 토대로 한 동국진체를 완성한 것이다.

원교의 동국진체는 모자라서 맛이 나지 않거나 지나쳐 난잡함이 없는 특유의 깊은 흥취가 담겨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 가는 길에 들른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서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비판했다가 9년 후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들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생을 마칠 때까지 15년간 이광사가 머물렀던 유배지는 신지도 금곡리로, 당시 적거지가 그대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황토집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유배지로 가기 전 마을 앞에는 원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약 250여년 수령의 원교목(円嶠木)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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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객길의 백미는 상산 남쪽 해안쪽 갯길의 서봉각 등대의 비경이다. 서봉각 등대는 완도항을 드나든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무인 등대로 80년대 초 횡간도 무장간첩선 침투사건 이후 등대지기와 전경이 근무했으나 현재는 하얀 등대만 남아 있는 곳이다.
 명사 객길의 백미는 상산 남쪽 해안쪽 갯길의 서봉각 등대의 비경이다. 서봉각 등대는 완도항을 드나든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무인 등대로 80년대 초 횡간도 무장간첩선 침투사건 이후 등대지기와 전경이 근무했으나 현재는 하얀 등대만 남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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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해안길, 명사 갯길

신지 명사 갯길은 자연 그대로의 길로 경관이 수려하고 우리 해양문화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보행 가능한 해안길로서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신청한 168개 길 중에 해안누리길로 지정됐다. 울창한 숲길과 아름다운 해안길은 힐링의 시간이 되기에 충분하다.

명사 갯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2017년 9월 걷기여행길 10선에 선정한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명품길로 주요 코스는 신지대교 휴게소–물하태–명사십리 해변–석화포항까지 약 12km로, 왕복 약 4시간이 소요되며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를 즐길 수 있다.

명사 갯길은 완도항의 아름다운 경관과 수많은 여객선과 어선들이 왕래하는 모습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어 지루함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명사 객길의 백미는 상산 남쪽 해안쪽 갯길의 서봉각 등대의 비경이다. 서봉각 등대는 완도항을 드나든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무인 등대로 80년대 초 횡간도 무장간첩선 침투사건 이후 등대지기와 전경이 근무했으나 현재는 하얀 등대만 남아 있는 곳이다. 전망데크가 설치돼 주변 다도해 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View point)다.

명사십리 백사장의 맨발걷기와 모래밭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체험하는 일명 '멍때리기'는 명사 갯길만의 묘미로 꼽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신지, #완도, #명사 갯길, #명사십리, #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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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은 1990년 9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참 언론을 갈망하는 군민들의 뜻을 모아 창간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사훈을 창간정신으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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