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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법 나이가 들어, 옛 친구들과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무척 다양해집니다. 옆 테이블의 '젊은 친구'들이 얼핏 우리 이야기를 엿듣는다면, 사실 산만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 살아온 토양이 다르다 보니, 가장 큰 공통분모에서 이야기가 풀려나가지만 어째 시간이 지나면 공허해 지기 마련.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거창한 주제에서 열띤 논의가 시작되지만, 곧이어 고대 로마의 전쟁과 평화 상태를 상징하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거쳐, 아이의 교육 문제 그리고 마침내 집안 설거지라는 화두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남북 회담과 로마의 평화 그리고 한 호민관 이야기가 난데 없이 대머리로 번지고, 그리고 샴푸와 대머리의 상관 관계에서 마침내 계면활성제에서, 중년의 숙제인 설거지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우선, 놀란 것은 전혀 그럴지 않을 것 같은 친구들이 모두 나름의 설거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름 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뜨거운 물과 세제의 적절한 활용법 등을 두고, 나름의 섬세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던 거죠.

저도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설거지에 동참해온 십여 년의 간헐적인 체험이 있기에, 참으로 집중적인 토론을 벌였습니다. 계면활성제와 염색약을 거부하고, 온수 세척을 신봉해서 아내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친구의 흰머리는 조명에서 희끗희끗 빛이 났습니다.

참으로 집중력 높은 토론을 끝낸 다음 날 오전. 문득 설거지를 하다가 - 전날의 늦은 귀가에 대한 면책용입니다, 제 설거지는 늘 이런 식의 소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벽면 선반에 꽂힌 6개의 스테인레스 컵걸이을 보면서, 로마의 야누스 신전이 겹치고, 문득 로마 제국과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이 겹치게 됐습니다.

야누스의 얼굴.
 야누스의 얼굴.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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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야누스 신전은 전쟁 기간에만 문을 열어뒀다고 하는데, 로마 역사상 신전 문이 닫힌 기간은 거의 없었다는 말이, 벽걸이에 마지막 설거지 컵을 꽂으면서 문득 떠오른 것입니다.

'6개의 컵이 가지런히 놓인 주방은 이제 그날 부엌 일과를 마감한 평화의 시간이겠지.'

그런데 이 안식은 정말 찰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막내딸이 "아빠 물" 하면서, 순식간에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뚝뚝한 고3 둘째 딸아이에 대한 음료수 공양, 마지막으로는 설거지를 마친 제가 목이 타서 설거지를 마치는 동시에 설거지 거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사나흘간 스테인레스 컵에 대한 감정이입이 생겨났습니다. 철로 만든 제품인 만큼 갑옷 입은 로마 군단의 병사도 연상이 되었고요.

'저 컵이 모두 꽂혀 시간,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혀 있는 시간, 주방의 마감과 로마의 평화, 과연 그 시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퇴근 후 첫 일과가 집안의 야누스 신전을 얼핏 바라보기. 그런데, 생각보다 안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아내가 게을러서는 아닙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은 소형을 고집하면서, 이 통이 적당히 차면, 몸소 가져다버리거나 아니면 저에게 분명하게 지시하는 '로마 황제'의 위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퇴근 시간에 보는 컵은 늘 한 개나 두 개가 늘 비어 있습니다. 늦은 시각에 일부러 설거지를 자원해서 모두 채워 놓으면, 더 늦은 시간에 회사에서 귀가하는 큰 딸이 한 개 군단을 금방 착출해 갑니다. 또다시 완벽하지 못한 벽걸이.

모두 제자리에 놓인 컵- 연출
▲ 컵 모두 제자리에 놓인 컵- 연출
ⓒ 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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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나흘의 관찰 끝에, 늘 전쟁을 치르는 우리 집안 '로마 황제'의 고달픈 일상도 상상하게 됐습니다. 무릇 타인에 대한 관찰은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넌지지 바라보면 안 된다고 하지요. 실제 텐트를 치고 그속에 들어가라는. 하지만 텐트를 칠 수 없는 직업인이기에 텐트 대신, 물컵에 감정을 이입해 봤습니다.

이제 관찰 보고서 순서입니다. 가벼운 순서부터입니다. 우선 1년에 한두 번 기분 내키면 하던 냉장고 청소입니다. 아내의 냉장고를 한번 쯤 자원봉사 차원에서 청소해 보신 분들은 - 이 마저 안해 보신 본들은 이미 되돌리기를 하셨겠지요 - 수개월 전에 시킨 치킨 무가 냉장고 구석에서 싹을 틔울 기세로 있고, 감자는 이미 싹을 틔우고 있고, 야채는 이미, 꽃을 피우고 하얗게 고사한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신경질을 내다가 냉장고를 청소한 공을 다 까먹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하루에도 서너 번 이상을 로마 군단을 훈련시켜 전투 장소에 내보내니까요. 숱한 전투에서 살아온 병사에게 옷에 티끌이 묻었다고 화를 내는 실수를 범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다소 무거운 관찰기입니다. 집안의 컵 꽂이에 6개의 컵이 모두 가지런히, 수일간 수주간, 수개월간 제자리에 머문다면 이제 아이들이 독립해서 나가고, 아내가 더 이상 실속없이 분주한 로마 황제가 아닐 때입니다.

집안의 컵이 조화의 장식품처럼 부질없이 놓인 시기겠지요. 살아있는 꽃과 조화의 구분은 아주 간단합니다, 살아 있는 꽃은 한군데라도 썩어 있고 아니면 최소한 생채기가 나 있지만, 조화는 늘 완전 무결하지요. 아주 나중에 아이들이 제 각각 자신의 물컵을 가진 시기라면, 부부의 로마 제국도 기울어 가고, 야누스의 문도 닫히겠지요.

저는 이 물컵을 이사를 하더라도, 버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컵
▲ 컵 컵
ⓒ 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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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설거지는 우리말이지만 어원이 실종된 단어입니다. 저는 설+걷다의 합성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삶이란 늘 설 걷고, 다시 차려내는 과정이기에.


태그:#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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