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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다대포에서 시작한 낙동정맥 종주가 경상남도, 경상북도를 거쳐 이제 강원도 경계까지 왔습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석개재라는 고개입니다.
 부산 다대포에서 시작한 낙동정맥 종주가 경상남도, 경상북도를 거쳐 이제 강원도 경계까지 왔습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석개재라는 고개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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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 지점에 있는 석개재라는 고개에서 남쪽을 향해 첫발을 내딛으며 낙동정맥 25구간 산행을 시작합니다. 오늘 걸어가야 할 거리는 무려 26㎞. 낙동정맥 종주 27개 구간 중에서 가장 긴 거리입니다.

이렇게 긴 거리를 하루에 가야 하는 이유는 중간에 산행을 끊고 내려갈 만한 적당한 지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이 그만큼 크기도 하고, 또 오지 중의 오지이기도 합니다. '한번 해보자'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보지만 살짝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산행 종료 지점인 답운재에 차를 세워 두고 택시를 불러서 출발 지점인 석개재까지 왔으니 어쨌든 답운재까지 26㎞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걸어가야만 합니다. 1천m 안팎 고도의 높은 산속이라 풍경은 아직 황량하기만 합니다. 나무도 이제야 삐죽삐죽 잎을 내밀기 시작하고 들풀도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냅니다.

1천m 산 위는 이제야 봄이 오는 듯

자작나무가 연초록 잎을 내고 있습니다. 높은 산중이라 봄이 더디 옵니다.
 자작나무가 연초록 잎을 내고 있습니다. 높은 산중이라 봄이 더디 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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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을 더욱 아름답게 감상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놓고 바라보는 것이고...
 진달래꽃을 더욱 아름답게 감상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놓고 바라보는 것이고...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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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해와 같은 방향, 즉 역광으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해와 같은 방향, 즉 역광으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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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활짝 피어난 진달래꽃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걸어가니 호젓함 가운데서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누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뭐예요?" 하고 제게 묻는다면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진달래!"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섯 살, 강원도 화천 산골마을에 살 때 뒷동산에 올랐던 어느 봄날 눈앞에 펼쳐지던 진달래 꽃밭의 황홀한 풍경은 5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 풍경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투영되면서 진달래꽃의 향기까지 물씬 느껴질 만큼 생생한 기억입니다.

진달래와 비슷하게 생긴 꽃이 철쭉이지만, 진달래와 철쭉은 비슷한 듯 다릅니다. 먼저 꽃과 잎이 피어나는 순서가 다릅니다. 진달래는 잎이 전혀 나지 않은 가지에서 꽃송이가 먼저 피어나지만, 철쭉은 잎이 먼저 돋고 나서 꽃이 피어납니다.

빛깔도 조금 다릅니다. 진달래는 수수하게 화장을 한 듯 연분홍색을 띠었지만, 철쭉은 짙은 분장을 한 듯 진분홍색을 띠고, 더욱이 점이 많이 박혀 있어 강한 느낌을 풍깁니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진달래꽃은 꽃잎을 따서 먹을 수도 있어 멋을 즐기던 선인들이 진달래 화전을 부쳐서 먹기도 했지만, 철쭉은 독기를 품고 있어 먹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듯 다른 진달래와 철쭉

현호색이 낙엽 사이로 솟아났습니다. 보랏빛 꽃송이가 참 곱습니다. 이렇게 꽃을 피운 현호색은 곧 씨앗을 맺은 다음 "뿅"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현호색이 낙엽 사이로 솟아났습니다. 보랏빛 꽃송이가 참 곱습니다. 이렇게 꽃을 피운 현호색은 곧 씨앗을 맺은 다음 "뿅"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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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골똘히 생각해 보는데.. 얼룩덜룩한 잎을 보자 이름이 떠오릅니다. "아~ 얼레지!"
 꽃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골똘히 생각해 보는데.. 얼룩덜룩한 잎을 보자 이름이 떠오릅니다. "아~ 얼레지!"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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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이 수수하고 순박한 느낌이라면, 철쭉은 화려하고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꽃입니다. 강한 이미지의 철쭉을 좋아하는 분도 많겠지만, 저는 언제나 수줍은 듯 뒤로 물러서 있는 진달래꽃에 마음이 끌립니다.

진달래꽃은 그 자체로도 예쁘지만, 진달래꽃을 더욱 아름답게 감상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놓고 꽃송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파란 하늘과 분홍 꽃송이가 의외로 조화를 잘 이룹니다. 청초하다고 할까, 청아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가슴 벅차게 밀려옵니다.

또 한 가지는 해와 같은 방향으로 진달래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엷은 진달래 꽃잎이 반투명으로 비치고, 또 꽃잎이 겹치는 부분은 조금 진한 분홍색으로 비치며, 꽃술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 대니 그 예쁜 모습이 보는 이의 애간장을 다 녹여 버립니다. 잠시 호흡이 가빠지면서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게 만듭니다.

진달래꽃을 쳐다보느라 혼미해졌던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진달래 꽃잎 두어 장을 따서 입에 넣고 우물거립니다. 진달래 향기를 입 안에 가득 채운 뒤 꽃잎은 목구멍으로 넘어갑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쓴 빌 브라이슨은 책 속에서 "우리 몸속에 있는 원자들 중의 상당수는 한때 셰익스피어의 몸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셰익스피어가 죽은 뒤 분해 과정을 거쳐 나온 원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속에 진달래 있다

요 나무 두 그루.. 썸을 타는 모양입니다.
 요 나무 두 그루.. 썸을 타는 모양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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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송의 늠름한 모습입니다. 늘씬하게 잘 자랐습니다.
 금강송의 늠름한 모습입니다. 늘씬하게 잘 자랐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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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셰익스피어의 몸속에 있을 때의 기능은 하지 못하겠지만, 방금 제가 먹은 진달래꽃은 뱃속에서 분해되어 진달래꽃의 속성을 지닌 분자 단위로 제 몸속 어딘가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제 몸 어느 작은 부분은 진달래꽃이다, 라는 유쾌한 상상을 해 봄 직합니다.

진달래꽃 향기에 흠뻑 취해 걸어가는데, 앞에서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립니다.

"푸르르르~~"

짐승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입니다. 순간적으로 귀가 쫑긋 서고 눈동자는 동그래지고 심장은 콩콩 뜁니다.

'뭐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전방 동태를 살핍니다. 하지만 그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멧돼지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라니라면 인기척에 놀라서 오두방정을 떨며 요란스럽게 도망쳤을 것인데, 젊잖게 소리 없이 피한 걸 보니 멧돼지가 틀림없습니다.

멧돼지는 먼발치에서 두어 번 만났을 뿐, 눈앞에서 맞닥뜨린 적은 없습니다. 멧돼지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저 스스로 알아서 피해 간다는 상식만 믿고 낙엽 소리를 부스럭부스럭 크게 내면서 또 걸어 나갑니다.

멧돼지? 제가 알아서 피하겠지

가슴 높이로 자란 산죽 사이로 낙동정맥이 지나갑니다. 잠시 앉아 보니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꼿꼿이 서서 가기만 한다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습니다.
 가슴 높이로 자란 산죽 사이로 낙동정맥이 지나갑니다. 잠시 앉아 보니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꼿꼿이 서서 가기만 한다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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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도봉, 용인등봉, 삿갓봉... 봉우리를 올라갔다가는 내려가고, 또 다음 봉우리를 올라갑니다. 숫자를 세는 것조차 번거로울 만큼 계속 나타나는 봉우리. 봉우리 이름은 있으나 이름난 봉우리는 없습니다. 모양도 비슷비슷, 거기서 거기 특별할 게 없습니다.

중간 중간, 낙동정맥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는 이정표도 나타납니다. 묘봉이란 봉우리가 마루금에서 500m쯤 떨어져 있고, 백병산도 그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루금을 걷는 거리만도 26㎞에 이르니 옆으로 잠시 빠져나가 그런 봉우리를 기웃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죽기 전에 올라야 할 100대 명산' 뭐 이런 거 아니면 당연히 '패스'입니다.

5㎞, 10㎞, 15㎞... 그러는 사이에 다리가 먼저 지쳐 갑니다. 처음에는 한달음에 오르던 봉우리를 한두 번 쉬어 가며 오르게 되고, 서너 번 쉬었다가 나중에는 대여섯 번 쉬면서 깔딱깔딱 넘어가는 숨을 골라야만 겨우 오를 만큼 점점 체력이 고갈되어 갑니다. 다리를 달래고 어르던 마음도 서서히 지쳐 갑니다. 불심재라는 고개가 나타납니다. 이제는 기진맥진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해탈을 향한 부처의 마음으로 가야 하나 봅니다.

다리가 먼저 지치고 마음도 나를 떠나

15㎞, 20㎞... 몸속에 남은 한 방울 힘까지 마른 행주 짜듯 짜내는 심정입니다. 이제는 나무도, 풀도, 꽃도 저한테서 멀어져 갑니다. 눈에는 보이겠지만 마음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침에 6도로 시작한 이곳 봉화 기온은 한낮에 30도 가까이 올라갑니다. 물론 산 위니까 그보다 조금 낮긴 하겠지만,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숲속으로 햇볕은 내리쬐고 바람도 불지 않으니 지열이 푹푹 올라옵니다. 얼려 온 생수를 연신 들이켜니 얼음 덩어리만 남아 덜렁거립니다.

이제 15㎞가 넘는 산행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더해 가면서 체력은 반대로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싫지만 인정할 때가 됐나 봅니다. 항상 그렇듯이 산에서 내려가고 내일이 오면 또 마음이 바뀔 것이니 지금 이 산속에서 결심을 합니다. 앞으로 15㎞가 넘는 산행은 삼가자. 크고 많고 긴 것을 향하려는 욕심을 이제는 거두자.

22, 23, 24㎞... 종료 지점을 다 가도록 평탄한 길은 나오지 않고 봉우리를 계속 오르내립니다. 나중에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드리어 26.2㎞ 답운재로 내려옵니다. 저만큼 세워 놓은 차가 보입니다. 이른 아침에 석개재를 떠난 지 12시간 20분 만입니다. 욕심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다짐해 봅니다.

나무가 굵어지며 바위를 쪼갠 뒤 쫙 벌려 놓았습니다. 이쯤 되면 나무와 바위.. 어떤 게 더 힘이 센지 모르겠습니다.
 나무가 굵어지며 바위를 쪼갠 뒤 쫙 벌려 놓았습니다. 이쯤 되면 나무와 바위.. 어떤 게 더 힘이 센지 모르겠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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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정맥 25구간 종주
날짜 / 2018년 4월 21일 (토)
위치 / 강원도 삼척시, 경상북도 봉화군, 울진군
날씨 / 대체로 맑고, 봉화 아침 기온은 6.0도였으나 한낮 기온은 29.5도까지 올라가 일교차가 무려 23.5도나 벌어졌습니다.
산행 거리 / 26.2㎞(이것은 GPS로 측정한 거리이고, 오르내림을 고려하면 실제 산행 거리는 28㎞쯤 될 것입니다.)
소요 시간 / 12시간 20분
산행 코스(남진) / 석개재 → 북도봉 → 묘봉 갈림길 → 용인등봉 → 문지골 갈림길 → 임도 → 삿갓봉(안일지맥 분기점) → 삿갓재 → 불심재 → 백병산 갈림길 → 934.5봉 → 840봉 → 한나무재 → 850봉 → 진조산 → 굴전고개 → 답운재
동행 없이 혼자 산행


태그:#낙동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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