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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부산 해운대구 인권증진조례안이 개정되었다. 사실 '개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구민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병력, 혼인여부, 정치적 의견 및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구체적인 차별금지 조항이 삭제되었고 엉뚱하게도 '구민 스스로가 인권의식 향상에 노력하고 인권시책에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였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모르겠고 구민들이 알아서 하시라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가 사는 서울과 부산은 거리가 있기에 분위기 파악이 어려웠다. 언론의 단편적인 보도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결국 해운대구의회 홈페이지에 접속해 회의록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본회의에서 최철우 구의원은 조례 개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런 내용의 발언을 했다. '동성애와 관련한 조례는 집요하게 사실은 외부의 압력이 존재한다.' 압력? 도대체 누가 행사한 것일까. 답은 이어지는 최 의원의 말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얼마 전 교회로부터 우리 의원들 몇 분이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갔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가신 분들 잘 알 것이 아닙니까? 인권, 성적 지향을 폐지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놀랍지 않다. 보수 기독교계가 성소수자를 제물 삼아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역사는 이미 오래되었다. 달라진 것은 이 움직임이 도의회와 구의회까지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종교에 기반한 미시적이고 광범위한 혐오의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있다.

신속히 막아야 할 혐오의 네트워크, 그런데 정부는?

이런 흐름이 지속되는 것은 분명 성소수자 인권 증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민사회와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책임감 있게 대응에 나서야 할 곳은 또 하나 있다. 바로 정부다. 우리 헌법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는 더 이상 인권조례가 폐지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국제적인 연대를 요청한바 있다. 그러나 인권위가 전부는 아니다. 한국에서 인권옹호가 주된 임무이며 인권 중시 및 약자 보호를 목표로 하는 정부 부처가 또 있기 때문이다. 바로 법무부다.

하지만 법무부가 과연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가령 얼마 전 발표된 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초안에는 '성적 소수자의 인권' 항목이 사라져 있었다. 한 국가의 인권 정책 방향과 목표를 다지는 계획안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성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배제, 혐오가 만연한 상황을 그저 방치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평등한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는 당연히 불가침의 인권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법무부의 행보는 결국 '성소수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성적 소수자 인권 항목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도 존재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셀프 모욕'이나 다름없다.

법무부의 계속되는 차별과 직무유기

법무부의 이 같은 성소수자 차별행위는 심지어 자체적인 규정과 법원의 판결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비온뒤무지개재단에 관한 이야기다. 2015년 4월 29일, 법무부는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사단법인 설립 신청에 대하여, "사회적 소수자 인권 증진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단체는 법무부의 법인설립허가 대상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불허 처분을 내렸다. 이후 몇 년 간의 법정 싸움 끝에, 2017년 7월 비온뒤무지개재단은 법무부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며, 법무부가 재단의 사단법인 설립을 담당하는 주무관청임을 확인하는 대법원 판결을 얻어냈다. 그리고 올해 1월 재단은 법인설립허가신청 관련 서류 제출을 마쳤다. 

하지만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여전히 사단법인 설립 허가 통보를 받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 소관 비영리법인 설립 및 감독에 관한 규칙'의 제4조 제2항이 '비영리법인 설립허가 신청을 받았을 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20일 이내에 심사하여 허가 또는 불허가 처분을 하고, 그 결과를 서면으로 신청인에게 통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도대체 왜 법무부는 왜 무리를 하면서까지 시간을 끌고 있을까. 다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으로 돌아가 보자. 법무부는 차별금지 항목에 '성소수자(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등)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종교계 등의 이견이 큰 상황이므로 국민적 공감대 형성 필요'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책임을 묻는다

보수 기독교계가 성소수자의 인권 증진을 저해하고 혐오를 전파하는 것이 그저 '다른 의견'인지 여부를 차치해 두더라도 문제가 많은 표현이다. 법무부는 다른 어떤 정부 부처보다도 법과 원칙을 중시해야 하는 집단이다. 인권 옹호라는 목적에 부합한다면 공감대를 직접 형성하거나 혹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고 해도 필요한 일을 하면 된다. 하지만 법무부는 오히려 혐오집단의 눈치를 보며 부정한 목소리를 스스로의 직무유기에 대한 그럴싸한 핑계거리로 둔갑시키고 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책임을 묻고 싶다. 그가 이런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면 철저히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내버려 두거나 오히려 주도하고 있다면 법무부의 원칙과 책임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뜻이다. 어떤 쪽이든 장관으로서의 자격이 의심이 가는 수준이다.

흥미롭게도 법무부의 인권국에서는 인권침해 신고센터를 운영 중이다. 비록 교정, 보호, 출입국 행정 등으로 분야는 제한되어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법무부의 법 집행 관련 인권침해 사건을 제보 받고 조사하며 해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궁금하다. 과연 이들은 지금 법무부가 인권기본계획에서 성적 소수자 인권을 삭제하고 대법원에서까지 확인 판결을 받아온 재단의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규정까지 어겨가며 미루는 것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까. 이렇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방치하거나 혹은 직접 수행하고, 넘쳐나는 혐오를 앞두고 소수자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져버리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지금의 사태를 보면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들에게 정확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기는 한 걸까.



태그:#법무부, #박상기, #비온뒤무지개재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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