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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자기가 한 일을 보라며 아이가 손을 잡아 끈다. 신고 나가기 편한 방향으로 작은 동글이 신발부터 아빠 신발까지 나란히 신발을 정리했다. 함박웃음과 열렬한 박수에 뜨거운 포옹까지 해 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자신이 해낸 일이 뿌듯한 동글이는 이후 가끔 신발정리를 했다. 끼리끼리 구분하거나 가지런히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날 닮지 않은 아들 덕에 현관이 깔끔한 날이 생겼다.

동글이의 신발 정리가 몇 번 반복되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칭찬 스티커'를 이용해 '밥 혼자 먹기'와 같이 잘 안 되는 행동을 칭찬으로 강화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동시에 실행에 옮겼다. 아이와 함께 칭찬 스티커를 붙일 숫자판을 만들었다.

스티커를 4개쯤 붙였을 때 칭찬 스티커 문제점이 보였다.
 스티커를 4개쯤 붙였을 때 칭찬 스티커 문제점이 보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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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소근육이 덜 발달한 6세 남아인 동글이는 숫자 쓰기를 힘들어 해서 몇 번이나 다시 쓰고 울고불고 했다. 어찌어찌해 완성된 숫자판에 숫자는 31번까지 쓰여졌고, 모든 숫자에 스티커가 붙으면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칭찬 스티커를 하려고 숫자판을 만들고 신발 정리와 스스로 옷 개기로 스티커를 한두 개 붙일 때까진 좋았다. 스티커를 4개쯤 붙였을 때 칭찬 스티커 문제점이 보였다.

'스티커를 주기 전에는 내가 격려해 주고 기뻐해 주는 거면 됐는데 이제 물적 보상이 따라야 아이가 기뻐하게 되는 건 아닐까? 외적 보상으론 내적 동기를 만들 수 없는데 이건 행동만 만들어내는 형식적인 시스템이네.'
 
마음이 요란해졌다. 안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던 아이에게 스티커란 몹쓸 짓을 제안한 내 발등을 찍고 싶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일이 가져다 주는 행복을 스티커라는 보상으로 바꾼 것 같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찍힌 발등을 어루만지며 그림책을 꺼내 스스로를 위로했다.


<느끼는 대로> 겉표지
 <느끼는 대로> 겉표지
ⓒ 문학동네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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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나 그렸어요. 어느 날 레이먼이 탁자 위 꽃병을 그리고 있을 때 형이 그림을 보고 "도대체 뭘 그리는 거야?"라며 웃었어요. 형이 놀린 뒤부터 레이먼은 무엇이든 똑같이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몇 달 후 레이먼이 펜을 놓으며 낙담하고 있을 때 여동생 마리솔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넌 뭐야!"

레이먼은 괜히 심통을 부렸죠. 마리솔은 오빠가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있다고 했어요. 레이먼은 이제 그림 같은 건 안 그린다고 소리쳤죠. 그때 마리솔이 레이먼이 구긴 종이를 들고 도망쳤어요. 레이먼은 가지고 오라고 소리치며 거실을 지나 동생방으로 뛰어들어 갔어요.

<느끼는 대로> 속표지
 <느끼는 대로> 속표지
ⓒ 문학동네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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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솔 방에는 그동안 레이먼이 구겨버린 그림들이 벽에 가득 붙어 있었어요. 마리솔이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고 했어요. 레이먼은 "꽃병을 그렸는데 꽃병처럼 보이지 않아..."라고 말했어요. 이에 마리솔은 "그래도 꽃병 느낌이 나"라고 말했어요.

레이먼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느끼는 대로 그리고 싶은 것들이 머리에 샘 솟는 레이먼은 손가는 대로 멈추지 않고 쓱쓱 그렸어요. 느끼는대로 그리는 건 아주 근사한 일이었죠. 레이먼은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느낌을 담은 글도 쓰게 됐어요. 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시 느낌이 나는 글이었지요. 레이먼은 그 뒤로도 오래오래 느낌이 가득한 삶을 살았답니다.

동글이가 레이먼처럼 느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 말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느낌적인 느낌으로 말이다. 여동생 마리솔 같은 엄마가 되려고 했는데, 칭찬 스티커란 잔머리는 레이먼 형과 같은 짓이었다.

아이가 신발을 정리하고 엄마와 그 일에 대해 공유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는데, 엄마는 장난감을 미끼로 스티커를 들이댔다. 그냥 장난감 사주고 스티커 숫자판을 치워 버릴까? 요리조리 다시 머리를 굴렸다. 중간에 멈추는 것보다 '빨리 31개를 채우고 다시는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칭찬 스티커의 또 다른 단점이 보였다.

스티커를 받지 못한 행동은 칭찬 받지 못할 행동인가? 아이 행동에서 어떤 게 칭찬 받을 일이고 어떤 게 받지 못할 일인지 구분하는 게 모순이었다.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보상한다면 다른 행동은 칭찬에서 배제된다. 짜장면 집 쿠폰을 모으다 보면 다른 집 짬뽕이 먹고 싶어도 쿠폰 모으는 중국집에서만 시키게 된다. 쿠폰 중국집 외 다른 집은 배제된다.

순간순간 아이가 한 행동에 대해 교감하고 공유하면 되는 건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버렸다. 칭찬 스티커 숫자판은 보기도 싫은 데 동글이는 열심이다. 스티커를 25개쯤 붙였을 때 동글이가 마지막 고지 6개를 앉은 자리에서 끝냈다.

"엄마 전화 하는 동안 기다려 준 거, 엄마 아침에 안 일어날 때 기다려 준 거, 엄마가 설거지 하는 동안 기다려 준 거, 엄마 글쓰는 동안 기다려 준 거..."

평소에는 칭찬 스티커를 안 붙이던 일을 마구잡이로 꺼내서 6개를 후딱 채워 31개 스티커 판을 완성했다. 작고 사소한 일도 칭찬 받을 만한 일이라는 걸 느끼게 되어 좋다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직접 해보면 그런 긍정 효과보다 아이가 칭찬을 칭찬으로 느끼지 않고 목적화 하는 부작용이 더 크게 느껴진다.

칭찬 스티커 31개를 다 채운 동글이에게 장난감을 사줬다. 이제 다시는 칭찬 스티커를 하지 않을 것이다. 동글이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서로 교감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그동안 치킨과 피자 쿠폰 못 모은 것이 아쉬웠는데, 선택권에 구애받지 않을 자유를 생각하니 아깝지 않다.


느끼는 대로

피터 레이놀즈 글 그림, 엄혜숙 옮김, 문학동네어린이(2004)


태그:#느끼는대로, #칭찬스티커, #행동강화, #피너레이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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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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