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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생명평화고운울림 4월 부산 기도순례에 다녀온 후기글입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은 '하늘땅사람의 생명평화', '몸과 마음의 생명평화', '일상 삶의 생명평화', '농촌과 도시의 생명평화',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 생명평화'를 증언하고, 꿈꾸는 기도순례입니다. 일제와 전쟁, 분단독재를 거치며 지금까지 반목하고 갈등하는 이 땅이 온 인류에 생명평화를 증언하는 땅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출발해 동북아 생명평화까지 나아가기에 앞서 남북 적대관계 해소를 바라고, 대한조선 영세중립화 통일을 염원하는 생명평화 고운울림은 2018년 2월 25일 안산 세월호합동분향소를 시작으로 제주, 부산, 광주, 대전, 태백, 백두산, 연해주, 평양, 서울, 판문점으로, 폭력과 분단, 구조적 모순이 만든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1000일간 이어질 순례 여정에 길벗으로 함께할 분들 환영합니다. - 기자 말

 어릴적 이북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흰여울마을에서 70년을 사신 어르신. 악전고투했지만 마을을 정성스럽게 살피며 살아오신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어릴적 이북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흰여울마을에서 70년을 사신 어르신. 악전고투했지만 마을을 정성스럽게 살피며 살아오신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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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하소"

이 말이 지금의 부산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표준어로 풀어쓴다면, "머물 자리가 필요하면 여기 쓰세요" 정도가 될까. 피란민의 땅, 한 때 한반도에서 가장 밀도가 높았던 도시. 부산 영도구의 좁은 방앗간에서 우릴 환하게 반겨주신 어르신도 흥남부두 철수 때 이북에서 배 타고 이곳으로 내려오셨다. 열 세 살 때 아버지와 큰누나를 남겨둔 채 어머니와 둘째 셋째 누나 함께 이곳에 내려오셨단다. 배는 거제도에 피란민들을 쏟아냈다. 부산에 미리 와계신 큰아버지가 어찌어찌 거제로 찾아와 부산으로 네 식구를 데려오셨고, 지금 사시는 흰여울마을에 터를 잡게 되셨다. 이 마을에 우연히 흘러든 건 아니었다.

부산시 공무원들은 몇 날 몇 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동네로 가고, 이 때 들어온 이들은 저 동네로 가라고 지정해주었다. 어디고 땅이 부족해 무덤 위에도 집을 지었고, 줄만 그으면 내 땅이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끼리 더 넓은 땅 갖겠다고 싸우지 않았다. 내가 열 평 땅 먼저 줄을 그었어도 더 딱한 이웃이 있으면, "여 하소"하고 선뜻 다섯 평 나눠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곳 집들은 두 사람 누우면 가득차는 집이다.

 출항을 기다리는 대형 선박들이 흰여울마을 앞바다에 정박해있다. 신년 정각에 일제히 뱃고동을 울려 새해가 왔음을 자축한다고 한다.
 출항을 기다리는 대형 선박들이 흰여울마을 앞바다에 정박해있다. 신년 정각에 일제히 뱃고동을 울려 새해가 왔음을 자축한다고 한다.
ⓒ 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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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마을은 영도 남쪽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선 마을이다. 문만 열면 가지런히 정박한 대형 선박이 여러 척 보인다. 신년 정각에 일제히 뱃고동을 울려 아이들은 재미있어하지만 할매들은 시끄럽다고 귀찮아하신다. 주민들은 모두 객지에서 몰려온 뜨내기들인데 자갈치시장에서 짐꾼으로 바다에서 물질로 고된 일 하며 수십 년을 건사해오셨다. 우리가 만난 어르신도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보셨고 그렇게 모은 자금으로 1990년 10월부터 이곳에서 고추방앗간을 시작하셨다. 자부심 갖고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피란민들은 점점 이곳을 떠나갔다. 한 동에 80세대가 살던 길 건너 영선아파트도 이제 텅텅 비어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 철책선 이남이 고향인 사람들은 진작에 돌아갔고, 일자리를 구하러 서울로도 많이 올라갔다. 돌아갈 고향이 없었지만 열심히 마을 살림 도맡아 35년을 통장으로 지내며 마을을 지키셨고 여전히 노인정을 포함해 여러 마을일에 힘쓰고 계신다.

 함께 방문한 생명평화고운울림 길벗들과 어르신.
 함께 방문한 생명평화고운울림 길벗들과 어르신.
ⓒ 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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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흘렀지만 이북에 계신 가족분들 찾고 싶은 마음 있으신지 여쭈었다. 어르신은 단번에 "없다"고 하셨다. 정권이 바뀌어 남북 관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 같은 이 때에 먼 곳에 가족이 있다면 당연히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답이 돌아올 것 같았는데 의아했다. 어르신은 아픈 아내를 돌봐야 하는 이 삶도 녹록치 않아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하셨다. 조카들 형편이라도 알게 되면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뭐라도 챙겨주어야 할텐데 잘해줄 자신이 없다고. 가족 만나길 포기하겠다고 답하기까지 어르신은 70년간 어떤 인생의 무게를 견디셔야 했을까. 매일매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포기하는 편이 지금 삶을 겨우 지탱해낼 수 있겠다 판단하셨을 것이다.

 영도의 가장 남쪽 벼랑 위에 만들어진 마을. 이곳에서 이미 수십 년 고단한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은 아름다운 경치와 영화로 유명해져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이 반갑지만은 않다고 하신다.
 영도의 가장 남쪽 벼랑 위에 만들어진 마을. 이곳에서 이미 수십 년 고단한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은 아름다운 경치와 영화로 유명해져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이 반갑지만은 않다고 하신다.
ⓒ 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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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흰여울마을 모두 비슷비슷한 이야기 위에 지어졌다. 서로 다르면서도 똑같이 위태로운 이야기들. 혼자서는 미끄러졌을지 모르지만 서로 터를 나누며 아무도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준 관계가 있어 그 시간을 버텼다. 마을에 함께 방문한 캐나다 친구가 물었다. "미국이나 남미에선 이런 빈민촌이 생기면 보통 범죄 소굴이 되는데, 여기는 너무 달라. 왜인 것 같아?" 한참 생각하다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견딜 수 없는 사건을 모두 다 함께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기억이 이어준 인연 때문에."

고단한 삶이지만 함께 기대어 새 생명 일구어간 분들께 평화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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