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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꽤 순조롭게 풀리는 줄로만 알았던 수도 델리, 핑크시티로 불리는 자이뿌르, 히피들의 성지 푸쉬카르, 그리고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나의 ​북인도 여행 일정은 막판에 꼬이게 되었다. 아그라에서 막장 바가지와 집단 성추행에 지쳐서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돌아오는 버스만큼은 편하게 타고 오고 싶었기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제일 빠른, 게다가 제일 비싼 버스 티켓을 급히 구했다.

내가 살던 데라둔은 작은 도시라서 가는 차편이 그리 자주 있지 않기에, 정말 급히 짐을 싸서 서둘러 버스를 타야했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려서 출발 직전 버스에 간신히 올랐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한없이 흘렸던 땀. 에어컨이 빠방하게 나오는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일행들은 '그래, 돈은 이렇게 써야 해' 하며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절하다시피 단잠에 깊이 빠져있던 나를, 일행이 흔들어 깨웠다. 가던 길을 잘 가던 이 버스의 엔진이 터져버려 버스가 움직이지 않은지 벌써 3시간이 넘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 나앉아서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역시 인도여행을 할 때엔 끝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동이 트고 나서야 다음 버스를 탔을 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티켓팅을 할 때 절대 타고 싶지 않았던 제일 후진, 게다가 그 날에 제일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버스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그 차를 타고 왔던 손님들로 인하여 나와 일행,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던 모두는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콩나물 시루마냥 빼곡히 서서 왔다.

에어컨은 물론 없거니와, 한번 덜컹거릴 때마다 천장에 머리를 찧게 되는 바람에 잠은커녕,
​손잡이를 잡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고문의 몇 시간을 보냈다.

​참 많은 생각이 오갔다. 이렇게 막차를 탈 줄 알았으면, 여유 있게 저녁도 먹고, 다른 유적지도 한 번 더 방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텐데. 지금 이렇게 무거운 배낭을 매고 서서 가지 않았을텐데. 최소한 앉아라도 갈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나 열심히 뛰어서 간신히 올랐던 '좋은' 버스였지만, 결국 먼저 출발한다고 해서 먼저 도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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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03학번이다. ​만 16세, 충남 최연소 수석으로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바로 교통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수재' 소리를 들으며(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쭐거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마주쳤을 때, 나는 공부를 포기해야만 했고, 개고생을 하며 모든 것을 다 포기했을 때 우연히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들 다 하나쯤 있는 대학 졸업장을 받는데 무려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 빨리 간다고 해서, 먼저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 9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의 인생은 수도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도 했고, 자존심은 이미 여러 번 바닥을 쳤다. 그래도 ​그동안의 세월이 한없이 감사한 것은 먼저 도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배웠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점은 지금이다. ​내가 지금, 오늘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결혼을 하면 행복할 거야... 취직을 하면 행복할 거야...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야...'가 아닌,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 혼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결혼을 해서도 행복할 것이고, ​취직을 하지 않았지만 매일 느끼는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감사할 줄 안다면, 나는 취직을 해서도 행복할 것이다.

남들과 비교하여 경쟁하며 더 빨리 인생의 무엇인가를 얻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서른. 아직 미혼인 데다가 만나고 있는 사람도 없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냥, 좋으니까'라는 이유로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선택하였고 사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급하지 않다.

나는 오늘도 인생의 정점을 보내고 있다. 상해는 계속 꾸리꾸리한 날씨에서 오늘 맑은 날씨로 바뀌었고, 불어오는 바람 마저도 따뜻하다. ​내가 지금 내린 커피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 맛이다.

​그간 추웠던 탓에 잘 크지 않았던 채소 텃밭은 다시 건강해지고 있으며, 내가 기르는 고양이도 기침을 멈추었고, 요즘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지만 원하는 대로 살이 잘 빠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냥 아직까진 바지를 입어도 큰 불편함이 없기에 감사할 뿐이다.

인생에 어느 순간은 남들보다 뒤처지는 듯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경쟁하여 얻어나가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나면, 지금 이 순간을 더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태그:#인도여행, #천천히, #속도보다는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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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 프랑스를 거쳐 다시 한국.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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