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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에 토르소가 있는 마을
 담장에 토르소가 있는 마을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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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낯선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새까맣게 마른.

한 달 이상을 걸었을 때 제일 낯설게 다가온 것은 내 외모였다. 음식이 맞지 않아 10kg이 빠졌고 햇볕 아래에서 내내 걸어서 피부가 새까맣게 탔다. 걷기 전부터 선크림을 미리 바르지 않는다. 땀 때문이다.

6~10km 즈음 걸으면 해가 뜨기 시작한다. 몸도 한 번 즈음 쉬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즈음이면 턱, 하니 바가 눈앞에 나타난다. 바에서 간단하게 요기도 하지만 화장실도 의무적으로 들른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을 때면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낯선 나와 조우한다. 새까맣게 마른.

새까맣게 타고 마른 얼굴의 낯선 나. 올베이로아(Olveiroa)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지를 넘어야 했다. 고지에서 한 컷!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새까맣게 타고 마른 얼굴의 낯선 나. 올베이로아(Olveiroa)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지를 넘어야 했다. 고지에서 한 컷!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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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7시간 동안 34km를 걸었다. 오전 내내 먹구름이 끼고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구간은 지리산둘레길 '상' 정도 난이도다. 오르막 숲길이 많다. 처음으로 바다를 본 길이다. 산세도 전에 걸었던 곳과 다르다. 제주도 곶자왈처럼 소나무 숲에 고사리가 울창하다. 아마도 바다가 가까워 선지도 모르겠다. 오전 내내 흐리다가 목적지 2시간을 남겨 둔 지점부터 햇살이 내리쬐었다. 눈부신 것만 빼고는 시원했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뒀다. 얼마나, 탈까 싶었다. 목적지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거울을 봤더니 이마가 까맣게 번들거렸다. 선글라스 쓴 부분을 제외한 곳은 더 새까매졌다. 판다의 다른 버전이었다. 집이었다면 멜라닌색소가 생길까 봐 호들갑 떨며 얼굴에 팩을 얹었을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실실 거리며 웃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타볼까, 라고 하면서.

집에서 입고 온 옷도 한 치수 정도 커졌다. 한 달 내내 빨고 입고 빨고 입고 해서 보풀도 일었다. 며칠만 더 입으면 된다. 다 걷고 나면 살랑살랑 원피스를 사서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광장 야외 카페에서 근사하게 타파스(tapas)에 상그리아(sangría)를 마셔볼까? 나는 걷기 시작한 뒤부터 외모에 신경 쓰지 말자고 했으면서도 내 본능은 그렇지 않는 듯했다.

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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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네그레이아(Negreira)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와인도 마시고) 어슬렁어슬렁 주변 상가 구경을 하면서 알베르게로 돌아올 때였다. 코와 눈을 자극하는 상점이 있었다. 향수 가게였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한낮에 도시를 걷기라도 하면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순례자들과 세련된 도시의 샐러리맨들이 뒤섞인다. 그럴 때 내 발걸음을 잡아채는 것이 있다. 좋은 향기이다. 좋은 향기는 비싼 향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막 샤워하고 나왔을 때의 비누 향을 나는 제일 좋아한다.

집에서 짐을 챙길 때 향수 한 병을 넣을까말까 오래 고심했다. 피곤할 때 맡는 향은 피로회복제이기도 했다. 짐이 될 것 같아 그냥 뒀다. 잘한 결정이었다. 분명 어느 알베르게에 놔두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좋은 향기에 끌린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어제 상큼한 향 향수를 사버렸다. 술기운과 며칠 뒤에 이 걷기도 끝날 거라는 심리가 작용했다. 내 무의식은 벌써부터 일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축사 안 창문에서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 그도 자유가 그립겠지?
 축사 안 창문에서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 그도 자유가 그립겠지?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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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작은 향수 한 병만 샀을 뿐인데 상큼한 향 샤워 젤까지 서비스로 딸려와 버렸다. 향수 용기보다 더 컸다. 계산대에 있는 용기 두 개를 내려다보던 나는, 샤워 젤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상큼한 샤워 젤도 필요했다. 나는 내내 세수 비누로 샤워를 해왔다. 그것까지 들고 왔다. 다음날 먹을 음식을 슈퍼에서 샀다. 쇼핑한 물건이 담긴 비닐 봉지 무게가 상당했다. 이제 그 무게와 부피를 감당해야 했다.

뜯어진 배낭

배낭 어깨걸이 3분의 1 접선 부분이 뜯어졌다.
 배낭 어깨걸이 3분의 1 접선 부분이 뜯어졌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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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오늘 12km를 걷고 난 뒤 첫 번째 바에서 쉬고 막 일어났을 때였다. 배낭을 들어 올렸을 때 후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오른쪽 어깨걸이 접선부분 3분의 2가 뜯어져버린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오른손으로 오른쪽 배낭 어깨걸이를 들어올린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이제 몸이 우선한다싶으니 배낭이 속을 썩이는구나, 라고 불평을 했다가 아, 너도 고생을 많이 하긴 했다, 우리 3일만 더 견뎌보자, 라고 달랬다.

배낭 한쪽 팔걸이가 떨어져 나가면 이 시골에서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배낭을 파는 상점이 어디에 있는지도(과연 있을까) 모르지만 돈이 있다 해도 새 배낭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길들여진 배낭은 이미 몸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아직 공존해야 했다.

나는 알베르게에 도착한 다음 뜯어진 부분을 물집 터트릴 때 사용했던 바늘과 실로 꿰맸다. 모양새는 필요 없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갈 짐을 든든하게 받쳐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상하게 바느질을 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공백이 생겼다. 그 틈을 비집고 슬그머니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배낭이 뜯어진 것은 욕심을 더 버리라는 신호가 아닐까? 내내 버렸다고 생각했던 욕심이 일상이 코 앞이다 보니 슬슬 다시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옥수수 밭이 있는 마을
 옥수수 밭이 있는 마을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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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 #프레그리노,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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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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