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89년 4월 21일, 하나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가 77세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나라가 망한 뒤인 1912년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군주의 자녀로 정식 인정을 받은 마지막 여성이 바로 덕혜옹주였다.

후궁 소생이라 공주 아닌 옹주로 불리기는 했으나, 외동이자 막내 딸인 덕혜옹주에 대한 아버지 고종의 사랑은 그야말로 지극했던 것으로 전한다. 망국으로 허울만 좋은 왕실이기는 했어도 고종을 비롯한 가족의 그 사랑이 있었기에,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던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은 그나마 안온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9년 고종이 돌연 세상을 떠난 뒤부터 덕혜옹주의 삶은 비극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복오빠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덕혜옹주 역시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빙자한 사실상의 인질 생활을 해야 했다. 1926년에는 아버지 대신 돌보아 주었던 순종이 세상을 떠났고, 1929년에는 생모 복녕당 양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1931년에는 원치도 않은 결혼을 일본 귀족과 해야 했는데,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던 그때 덕혜옹주는 이미 심신이 병들어 있었다.

이후 30년 동안 덕혜옹주는 이혼, 딸의 실종 등 자신의 불행마저 점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될 만큼 심각한 상태로 투병을 이어 갔고, 1962년 1월에 귀국하기 전까지 십수 년 동안은 가정이 아닌 정신병원이 그의 생활공간이기도 했다. 30여 년 만에 너무나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 덕혜옹주를 보며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음은 물론인데, 그 무렵 남호심이라는 가수가 <덕혜옹주>라는 가요를 발표했던 것도 그러한 당시 대중의 심정이 반영된 바였다.

그런데, 덕혜옹주와 관련된 노래가 그를 소재로 삼은 대중가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덕혜옹주 자신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10대 초반에 쓴 동시가 있는데, 거기에 곡이 붙여져 만들어진 동요가 또 두 곡이 있다. 덕혜옹주의 시가 있고 그것이 노래로도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지난 2011년 일본인 연구자 다고 기치로(多胡吉郎)씨의 소개로 어느 정도 알려졌는데, 시 내용과 악보까지는 공개가 되었으나 실제 소리를 담고 있는 음반은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다.

덕혜옹주의 노래를 수록한 SP음반 딱지
 덕혜옹주의 노래를 수록한 SP음반 딱지
ⓒ 가토 마사요시

관련사진보기


덕혜옹주가 노랫말을 쓴 동요 <벌(蜂)>과 <비(雨)>를 수록한 음반은 1929년에 일본 빅타(Victor)레코드에서 발매했다. 음반 딱지 표기를 보면 도쿠에히메(德惠姬), 즉 덕혜옹주가 '작가(作歌)'했다는, 즉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족이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존칭 표현으로 '작가' 앞에 '어(御)'가 붙은 것이 이채롭다.

<벌>과 <비> 두 노래의 곡조를 만들고 녹음에 참여해 직접 반주까지 맡은 이는 일본 전통악기인 소(箏) 연주가이자 작곡가로 유명한 미야기 미치오(宮城道雄)이다. 전통음악과 외래음악을 아우르는 '신 일본음악'을 주창했던 미야기 미치오는 전통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고 연주했는데, 그 중 하나가 덕혜옹주의 노래였다.

덕혜옹주가 노랫말을 쓰고 미야기 미치오가 곡을 만든 노래 <벌>과 <비>를 직접 불러 음반에 녹음한 마키세 카즈에(牧瀨數江)는 미야기 미치오의 처조카이다. 미야기 미치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후계자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마키세 카즈에와 덕혜옹주 사이에는 참으로 묘한 공통점이 있으니, 우선 두 사람 모두 1912년에 태어난 동갑이고, 일본인 마키세 카즈에의 출생지도 한국인 덕혜옹주와 마찬가지인 서울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덕혜옹주의 작품을 수록한 1929년 발매 SP음반은 일본의 저명한 음반 수집가 가토 마사요시(加藤正義)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덕혜옹주의 타계일인 4월 21일을 하루 앞둔 20일 밤 10시에 국악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의 교차로>를 통해 실제 음원이 공개될 예정이다.


태그:#덕혜옹주, #가토 마사요시, #미야기 미치오, #벌, #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래를 찾는 사람, 노래로 역사를 쓰는 사람, 노래로 세상을 보는 사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