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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실전, 여행도 실전. 여행에 대한 막연한 환상보다 안전하고 당당한 여성의 여행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혼자 하는 여행뿐 아니라 모든 여성 여행자가 당당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 기자 말

네팔 포카라를 여행할 때였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어디선가 "니하오, 니하오오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상점가를 걸을 때 이곳 네팔 상인들이 호객을 위해 '나마스테', '곤니치와', '니하오', '안녕하세요'와 같은 각 나라의 인사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그 나직하고 찰기 없는 목소리들과 달리, 이 '니하오'는 명백히 동물원 원숭이를 부르는 듯한 희롱 소리다.

쳐다보니 이곳 주민들이 아닌 깔끔하고 비싼 등산복으로 치장한 인도(혹은 네팔) 청년들 4명이 나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려다가 인상을 쓰고 그 청년들 앞에 가서 양팔을 허리에 얹었다.

"너 왜 나한테 인사해? 너 나 알아?"

지나갈 줄 알았던 내가 방향을 돌려 앞에 서자 그들은 당황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친구를 좋아하는 붙임성 있는 성격이라 내게 인사를 했다'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딸깍- 내 마음속 분노의 스위치가 켜졌다.

"그래? 네가 그렇게 사교성이 좋아? 그럼 여기 서양 여자 지나가네. 가서 '헬로우' 해봐. 이쪽에 동양 남자 지나가네. 가서 '니하오' 해봐. 너 왜 쟤들한테는 인사 안 해?"

도대체 그 '붙임성'은 왜 서양 여성이나 동양 남성이 아니라 동양 여성만 보면 발동한단 말인가? 당황해서 대답도 못 하고 있는 그들에게 '두 번 다시 동양 여성에게 인사하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섰다.

등 뒤로 수군수군 소리가 들려서 다시 돌아서서 흰 눈동자로 아래위로 째려봐 주었다. 아마 이들은 이상한 동양 여자한테 잘못 걸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들이 또다시 동양 여성에게 '니하오'를 외치기 전에, 오늘의 경험을 생각하며 주춤하길 바랄 뿐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이 시작되는 네팔 포카라. 이곳에도 기분 나쁜 인종차별과 성희롱은 있었다.
▲ 네팔 포카라에서 바라본 페와호수 히말라야 트레킹이 시작되는 네팔 포카라. 이곳에도 기분 나쁜 인종차별과 성희롱은 있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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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적 표현이나 행동은 남녀 모두가 겪는다. 남미 등지에서는 중국인을 뜻하는 '치나', '치노'라는 소리를 듣고, 중동이나 유럽에서는 역시 중국인을 뜻하는 '친', '칭쳉총'이라는 말에 시달린다. 대한민국도 외국인을 보면 '양키', '쪽발이', '검둥이'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듯이, 아직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한 미성숙한 사회나 집단이 있다.

문제는 여성 여행자의 경우 남성에 비해 불쾌한 경험을 겪는 빈도가 높은 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인종차별에 성희롱까지 더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에는 오랜 식민지적 관습에 따른 동양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 동양 여성은 이색적이고, 순종적이고, 수동적일 거라는 이미지들이다. 이런 편견을 지니고 동양 여성에 집착하는 남성을 '옐로우 피버 페티시(Yellow fever fetish)'라고 한다. 이번 연재는 동양인 여성 여행자가 특히 주의해야 하는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말을 하거나 한국문화에 관심 있다는 외국 남성

지난주에 여성 여행자가 주의해야 할 남성에 대해 알아보았다(관련 기사: "탄트라 요가 알려줄게" 여행할 때 이런 남자는 조심 http://omn.kr/quo6). 그리고 하나 더 조심해야 하는 유형이 있다. 바로 한국어를 하거나 한국문화에 관심 있다고 하는 외국 남성이다. 낯선 외국에서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외국인을 만나면 반갑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노려 한국 여성에게 접근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례 1
인도 델리에서 스마트폰 심카드를 개통하려던 여행자 A. 그곳에서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유창한 한국말을 하는 남성을 만났다. 도움이 필요하던 차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와 친해졌는데, 알고 봤더니 그는 한 한국 여성과 결혼을 했음에도 다른 여성을 만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남성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2015년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방영되기까지 했다.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한 상태에서, 총각행세를 하며 다른 여성을 만나왔다고 한다
▲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나왔던 인도청년의 이야기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한 상태에서, 총각행세를 하며 다른 여성을 만나왔다고 한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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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미국 마이애미를 여행하던 여행자 B.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국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는 한 미국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양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고 궁금증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 자꾸만 술을 더 먹이려고 하거나 자기 집으로 가서 영화를 보자고 하거나 등의 뻔한 수작이 이어졌고, 결국 그 남성을 피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례 3
여행자 인터넷 커뮤니티인 카우치서핑(Couch Surfing. 숙소공유를 통한 문화체험 사이트)을 통해 여행정보를 수집하던 여성 여행자 C. 어느 날 한 이탈리아 남성의 메일을 받았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오면 여행안내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남성은 자신을 한국과 일본 전문 기자라며 소개하며, 한국어와 일본어로 인사말을 작성했다. 하지만 그 지역은 가려던 지역에 속해있지 않았기에 바로 사양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한 달 후 그 남성에게서 뜬금없이 욕설과 함께 음란 사진이 메시지로 왔다.

마지막 사례는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다. 그 이탈리아 남성으로부터 음란메시지를 받았던 시점은 2014년 10월, 6개월간의 실크로드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였다. 사진은 그가 동양인 여성과 함께 있는 사진과 그가 알몸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사진, 그의 성기사진 등이었다.

알몸에 앞치마를 맨 모습, 동양여성과 밥을 먹는 모습, 성기 모습 등을 사진으로 보냈다. 성기 사진 아래에는 "suck it?  이라고 적혀있었다.
▲ 음란메시지를 보낸 이탈리아 남성 알몸에 앞치마를 맨 모습, 동양여성과 밥을 먹는 모습, 성기 모습 등을 사진으로 보냈다. 성기 사진 아래에는 "suck it? 이라고 적혀있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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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음란 메시지를 받고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해당 웹사이트에 신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계정을 삭제한 후였고 해당 웹사이트로부터는 '계정을 삭제한 경우에는 막을 방법이 없다'라는 답변만 들었다. 아마 그는 다른 이름으로 계정을 만든 다음,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이 남성의 사례를 널리 알리기로 했다. 해당 웹사이트에 있는 이탈리아와 관련된 모든 게시판에 그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적어 글을 올렸다. 그는 어느 지역에 살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인상착의는 어떻다 등을 게시판에 올리자 한국, 일본, 중국의 여성들에게서 제보 메시지가 왔다. 자신들도 그 남성에게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이탈리아인들도 그에 대해 제보를 보냈다. 그는 아시아 전문 매거진의 기자가 아니라 동양 여성을 노리고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동양 여성 전문 변태였다.

매번 연재 때마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이 사례들은 모든 경우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한국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 중에 당연히 좋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한국어, 한국 문화를 앞세워 친근감을 유발하고 이를 악용하려는 사례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만약의 사태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문화차이'라는 변명에 대하여

얼마 전 한 여행자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한 여성 여행자가 터키 여행 중 한국어를 공부 중이라는 현지 남성과 친해졌는데, 그가 억지로 허리를 껴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는 것이다. 그 여성이 불쾌감을 표시하자 그 남성은 친구 사이여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 여성은 물었다.

"터키에서는 친구 사이에 뽀뽀하나요?"

일단 대답부터 하자면,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십년지기처럼 구는 남성들이 있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무리하게 팔로 허리를 감싸려고 한다거나, '쪽, 쪽' 하고 짧고 경쾌하게 끝나야 할 유럽식 인사인 비쥬가 '쭈욱-, 쭈욱-' 하고 길어진다거나, '한국 남자들 성기가 그렇게 작다며? 한국 남자와의 섹스는 만족해?' 이런 식으로 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내려는 식이다.

유럽식 인사 비쥬(비즈)는 사실 볼만 마주 대고 입으로 쪽 소리를 내는 것이다.
▲ 뽀뽀가 길어지는 것은 연인사이에서나 있는 일이다. 유럽식 인사 비쥬(비즈)는 사실 볼만 마주 대고 입으로 쪽 소리를 내는 것이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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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상대 남성들은 문제의 초점을 여성에게 돌린다. '네가 보수적인 문화권에서 와서 잘 모르나 본데, 여기선 이게 보통이야', '언어장벽 때문에 네가 오해한 거 같아' 등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문화 차이' 혹은 '언어장벽' 때문에 생긴 오해라는 것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서구권 남성들이 주로 보인다. 그럴 땐 '아, 외국에서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

일단 헷갈리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이 사람이 같은 나라 여성에게도 그랬을까?
2.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면 그랬을까?

만약 이 터키 남성이 터키 여성을 처음 만났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억지로 허리를 손으로 감싸고 볼에 뽀뽀를 했을까? 만약 당신이 남자였다면 이 독일 노인이 당신 엉덩이를 '톡, 톡' 두드렸을까? 당신이 생각한 답이 '아니다'라면, 이 사람이 당신에게도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헷갈리면 이 사람이 자국 여성에게도 이렇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된다. 자국 여성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외국인 여성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 모스크에서 함께 기도하는 터키 남녀 헷갈리면 이 사람이 자국 여성에게도 이렇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된다. 자국 여성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외국인 여성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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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설사 이것이 그쪽 문화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불쾌감을 느꼈다면 당장 그 행위를 중지시키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상대 여성의 섹스 라이프'를 묻는 것이 스페인의 예법이더라도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실제로 그런 예법은 없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여성이 불쾌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내가 실수하는 거 아닐까?'라는 우려다. '정말 문화 차이면 어쩌지?', '유럽은 우리보다 훨씬 개방적이니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않을까?', '괜히 이야기했다가 이 사람이 불쾌해하면 어쩌지?', '내가 촌스럽게 굴고 있나?' 등.

우리는 서양 문화에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상황의 중심에 '나'를 놓고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원치 않는 접촉으로 인해 불쾌한데, 우리는 왜 상대 기분을 먼저 배려하고 상대 문화를 먼저 배려해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 '문화 차이'라면 어째서 일방적으로 서구의 문화가 우선되는가?

상대가 '문화 차이'라고 이야기하면, '우리에겐 그런 문화가 없으니, 나는 따르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상대 문화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고 자란 문화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동은 '문화 차이'가 아니라 단지 '성추행'이라는 것이다. '문화 차이' 같은 소리에 넘어가지 말고,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접촉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이야기하자.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의 이미지는 도식화된 편견이 불러오는 인종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 여행 중 만난 다양한 모습의 동양 여성들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의 이미지는 도식화된 편견이 불러오는 인종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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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여성으로 여행한다는 것

지금까지 동양 여성이 여행하며 좀 더 주의해야 할 상황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동양 여성으로 여행하는 것'은 서양 여성보다 그리고 동양 남성보다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같은 여성이지만 서양 여성보다 나약하게 여겨지고, 같은 동양인이지만 동양 남성보다 만만하게 취급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양 여성이 여행한다는 것은 좀 더 용기 있는 도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의 이미지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저 외부에서 멋대로 씌우고 평가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이미지들에 휘둘리지 말고 모든 결정은 스스로 판단해서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연재는 '여성의 여행을 가로막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여성 여행자를 둘러싼 편견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태그:#여자혼자여행, #여성여행자, #여행안전, #나홀로여행, #여성혼행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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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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