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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4.23 10:19수정 2018.04.23 10:19
간혹 방송 출연 요청이 들어온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나가도 되는 이유를 얘기해준다. 첫째, 생방송이 아니고 녹화라는 것이다. 잘하지 못하면 편집할 텐데 무슨 걱정인가. 둘째, 당신이 할 만하니까 불렀다는 것이다. 그들 판단을 믿으란다. 셋째, 시청률이 5% 넘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100명이면 고작 한두 명 본다. 넷째, 대본도 있으니 사전에 준비하면 된단다. 다섯째,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제작진이 도와줄 테니 자신감을 가지란다. 그제야 나는 자신감을 갖고 방송에 나간다.



글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쓰면 된다. 첫째, 글도 편집하면 된다. 퇴고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둘째, 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건강하니까 쓸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가. 일단 쓰면 된다. 셋째, 당신이 쓴 글에 다른 사람은 그다지 관심 없다. 당신이 다른 사람 글에 크게 관심 없는 것처럼. 넷째, 자료 열심히 찾고 시간을 들이면 된다. 다섯째, 최선을 다해 쓴 뒤에 남에게 보여주면 수정 의견을 받아 더 좋은 방향으로 고칠 수 있다.

글 쓰는 일에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는데 어찌 잘 쓸 수 있겠는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자전거도 배워야 탈 수 있다. 설사 배웠다손 쳐도 해보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걸음마도 젓가락질도 해봐야 할 수 있다. 초중고 시절에 글쓰기를 해본 적이 있는가? 고등학교 시절, 작문 시간은 있었지만 그 시간에 글쓰기를 배우지는 않았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까. 

글쓰기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글쓰기 교수법의 대가 윌리엄 진서(William Zinsser)가 그랬다.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는 실제로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인간의 행위 중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다.

왜 어려운가. 쓰기 싫기 때문이다. 쓰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뇌는 예측 불가하고 모호한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안전 욕구가 본능적으로 있다. 그런데 글쓰기야말로 정체를 알 수 없다. 정답이 없다.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모호한 대상이다. 누구나 모르면 불안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여기에다 끝까지 못 쓸까 봐 불안하고, 못 썼다는 소릴 들을까 봐 또 불안하다. 그러면 일단 피하고 본다.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뇌가 말한다. '너, 오늘 피곤하지 않아?' '왜 굳이 오늘 쓰려고 해? 내일 써도 되잖아.' 결국 우리의 의지는 꺾인다. '그래, 내일도 있잖아' 하면서 쓰는 것을 미룬다. 뇌의 유혹에 지고 만다.

글쓰기는 또한 고도의 정신 활동이다. 복합적 능력을 요구한다. 머릿속 생각을 끄집어낸다. 적절한 어휘를 찾는다. 문장을 쓴다. 논리적으로 문장을 연결한다. 전체 구성을 짠다.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아 그것을 드러내 표현한다. 상사의 지적도 염두에 둬야 한다.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 순서를 결정하고 문단을 구성하는 데에도 갈등이 따른다. 선택해야 한다. 골치 아프다. 이 모든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한 가지도 어려운데 멀티태스킹 능력을 요구한다. 여기에 육체적인 피곤도 감수해야 한다. 어찌 글쓰기가 쉽겠는가.

여기에 엄살도 끼어든다. 누구나 자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한다. 독서량이 적다, 어휘력이 부족하다,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막상 쓰지 못했을 때 실망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약점을 과장함으로써 예방주사를 맞는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당신의 실력이 생각한 것 그 이상일 수 있다.

심리학에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것이 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반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능력 없는 사람의 착각은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한마디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이에 반해 능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허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과소평가한다.

1999년 미국 코넬대학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과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가 글쓰기와 유머, 논리적 추론 등 세 영역에서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이 분야에서 뛰어나려면 지혜, 지식, 요령 등이 필요하지만 무능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야말로 능력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기발한 생각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나는 늘 막연했다. 이번에는 쓸 수 있을까 두려웠다. 대개 세 가지 두려움이다. 첫째, '어떻게 시작하지?'라는 첫 줄에 대한 공포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든다. '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쓴다는데 어느 누가 뭐라고 해. 정답이 어디 있어. 당신이 알아?'라며 배짱을 부린다. 둘째, '쓸 말이 있을까?'라는 분량의 공포다. 나는 이렇게 주문을 건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이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 내가 갖고 있는 콘텐츠는 하나밖에 없어. 내가 살아온 날만큼 쓸 말도 많아. 내 것이 가장 독창적이야.' 마지막 셋째는 '내일까지 쓸 수 있을까?'라는 마감의 공포다. 나는 되뇐다. '쓰면 써지는 게 글이야. 이전에도 늘 그랬잖아.'

자신감은 세 가지 경로로 손상된다. 첫째는 사람에 의해서다. 주변에 지적, 비판하는 사람 일색일 때다. 둘째, 상황에 의해서다. 하는 일마다 실패할 때다. 사는 것이 바위에 계란 치기 같을 때다. 셋째, 스스로에 의해서다. 자신감은 자아효능감과 자기존중감의 결합이다. 자아효능감이 낮은 사람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존중감이 높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남의 눈치를 보고 주변을 기웃거린다.

일부러라도 자신감을 북돋아야 한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내 안에 있는 쓸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집토끼가 아니라 산토끼를 찾아 헤맨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참고자료부터 뒤진다. 사방팔방 물어본다. 이전에 누군가 써놓은 보고서가 없는지 찾는다. 자기 안에 파랑새를 두고 구천을 헤매는 격이다. 학교 다닐 적에 남보다 시험 점수 잘 받을 요량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난리 궂을 한다. 그러나 결국 시험 하루 전날 자신이 필기한 노트에 매달리게 되고, 그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찾는 게 먼저다. 사람은 하루에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이 무수히 많고, 거기서 얻은 정보가 무의식에 저장된다. 버스를 타고 가다, 혹은 산책하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자신이 의도해서 생각난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이런 무의식의 세계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크다.

무의식에 저장돼 있는 것을 길어 올려 쓰려면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내 안에 쓸거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쓸거리는 살아온 시간만큼 있다. 많이 배우고 덜 배우고를 떠나 공평하게 있다. 의식 세계는 불평등하지만 무의식 세계는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과도하게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 글이 안 써지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면 주어진 일을 잘하지 못한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불안은 뇌의 특정 부위를 긴장시켜 적절한 행동을 방해한다. 물론 나와 같은 '관심 대마왕'은 예외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머릿속으로 썼다 지웠다만 반복한다. '내가 이렇게 쓰면 상사가 뭐라고 하겠지? 틀림없이 이런저런 지적을 할 거야.' 자체 검열을 하며 쓰는 것을 주저한다. 이렇게 지레 겁을 먹으면 글이 그것을 눈치채고 글 쓰는 사람 위에 군림한다.

결국 글을 지배하고 글 위에서 호령해야 할 내가 글의 눈치를 보고 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한다. 당연히 생각도 나지 않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도 못한다. 고로 글은 쓰면 써지는 것이라고 믿고 써야 한다.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써지는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기발한 생각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쓸거리는 써야 나온다. 개요도 써야 정리되고 짜인다. 시작할 때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써가며 알게 된다. 모르니까 쓰는 것이다.

자신감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언제든 내가 쓴 글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보여주는 것을 망설인다. 벌거벗은 생각과 감정을 내보이는 게 부끄럽고, 남의 평가가 두렵다. 눈치를 보면 절반은 진 것이고, 주눅이 들면 완패다. 써지지도 않고, 써도 좋은 글이 안 나온다. 이에 반해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자기 글을 남에게 자신 있게 보여준다. 호평이나 혹평에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받았다고 우쭐하지도, 혹평에 의기소침하지도 않는다. 타당한 건 흔쾌하게 받아들이고 무시할 것은 묵살한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며 거부한다.

나아가 마음속 다툼도 없다. 당신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생각한다. 청탁병탄(淸濁倂呑)한다.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삼킨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람은 더 잘 쓰고, 안 보여주는 사람은 더 못 쓴다. 보여주지 않는 글은 의미가 없다. 많이 보여줄수록,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수록 글은 좋아진다.

자신감은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나는 글 잘 쓰는 사람이다'란 표식을 붙이자. 조직에서 '나는 글을 못 쓴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딱지가 붙은 사람의 글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고쳐줘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탄다. 사사건건 지적한다. 결국 자신감을 잃고 진짜로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된다.

작은 성공이 모여 자신감을 만든다

그렇다면 글쓰기 자신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 번째 방법은, 내 글에 호의적인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구든 좋다.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정 과장이란 분이 있었다. 늘 '잘 썼다'고 칭찬했다. 나 스스로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회 초년병 시절 큰 힘이 됐다. 글쓰기에 관해 자신감을 갖는 토대를 마련해줬다. 지금도 보험회사에 다니는 친구 한 명이 내 곁에 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그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늘 내 편이다. 그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자신감이 붙는다.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또 다른 방법은 매일 글을 쓰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작가는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라고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일 일정 분량을 쓰는 것이 자신감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자신에 대한 긍정성, 즉 자신감은 성실에서 나온다. 내가 열심이면 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긍정적이다.

글을 열심히 쓰면 뿌듯하다. 새벽까지 쓰고 나면 스스로 대견하다. 그러면 자신감이 생긴다. 그 힘으로 또 열심히 쓴다. 일정 시간 동안이 아니라 일정 분량을 매일 써보자. 하루 1시간씩 쓰지 말고, 하루 원고지 5매씩 쓰자고 정해보자. 시간은 일정하기 때문에 지루하다. 원고지 5매는 다르다. 어느 날은 금세 써지고 어느 날은 온종일 걸린다. 변화가 있다. 오늘은 빨리 써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분량 역시 최소한으로 정하자. 많이 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감을 높이는 세 번째 방법은 글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를 찾는 것이다. 글을 잘 써서 이룰 수 있는 꿈은 많다. 작가가 되겠다는, 혹은 책을 쓰겠다는 간절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자신감은 절로 붙는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꿈을 비웃었다. 이루지 못할 목표를 좇는 것이 어리석게 보였다. 꿈이라는 미명 아래 나를 채찍질하는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바뀌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산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의 뇌는 발전과 성취 본능이 있으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꿈을 꾸면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 뇌는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젠 나도 글을 써서 이룰 수 있는 장대한 꿈을 꾼다. 내 글이 점점 나아져 글을 잘 쓰게 되지 않을까, 혹시 내 안에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꿈꾼다. 잘 쓰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살아오면서 누구 못지않게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밀운불우(密雲不雨)라고 했다. 구름 안에 물은 잔뜩 머금고 있는데 비를 뿌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누가 아는가. 언젠가 소나기 같은 폭우가 쏟아지면 곧장 소설이 될 것이요, 또 언젠가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처럼 시가 되어 내리는 날이 올는지.

굳이 큰 꿈이 아니어도 된다. 글 쓸 때마다 작은 목표를 하나씩 정해보자. 창피만 면하면 된다. 분량을 채우기만 하자. 마감 내에 쓰기만 하자. 문법에 맞게만 쓰자. 독자가 이해 못 하는 글만 쓰지 말자. 이런 목표를 갖고 쓰면 성공한다. 작은 성공이다. 이런 성공이 모여 자신감을 만든다.

나는 요즘도 글쓰기가 두렵다. 그럴 때마다 헤밍웨이가 한 말을 생각한다. "걱정 마. 항상 써왔으니 결국 쓰게 될 거야." 아내에게 혼날 때도 항상 끝은 왔다. "또 그럴 거야?" 다 혼냈다는 소리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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