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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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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 시작된 지 아직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올해는 어떤 영화가 좋았다더라'를 말하기 무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2018년 개봉한 영화 중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를 하나만 꼽으라면 <피의 연대기>를 꼽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여성들이 흘리는 '피'에 대한 고찰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뒤 근 몇 달간 나는 초경 후 느끼지 못한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쓰는 '생리대'에 큰 불만이 없었다. 물론 '밑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의 생리통, 생리대를 잘 착용하지 못해 이불 빨래를 하는 등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크고 작은 '불편'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견디고 있으니까' 큰 불만 없이 넘어가곤 했다.

탐폰이나 생리컵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생리용품에 대해서는 다소 보수적인 시각이었다. '그래도 많은 여성이 생리대를 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면서 적극적으로 변화를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의 연대기>를 본 이후로 모종의 불만이 시작됐다.

정확히는 <피의 연대기>를 본 후 돌아온 생리 주기에서부터였다. 내가 쓰는 생리 '패드'의 존재가 이렇게 컸나? 갈아도 갈아도 패드는 눅눅했고 찝찝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한 불편함이었다. '생리대 파동' 이후에도 다른 대안이 없다 여기고 감내하고 사용했던 생리대였다. 전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일회용 생리대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생리'에서 시작된 '여성 몸의 탐구'

책 <생리공감>
 책 <생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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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 김보람 감독이 영화 개봉 한 달 뒤에 출간한 책 <생리공감 : 우리가 나누지 못한 빨간 날 이야기>는 <피의 연대기>의 '책 버전' 같다. 다만 추가된 내용이 있다. 책에는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생리에 대한 취재 과정과 감독 스스로 여러 생리용품을 탐구하면서 돌이켜 본 개인적인 생각이 좀 더 많이 담겼다.

네덜란드 친구 샬롯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궁 내 피임 장치를 삽입하는 시술(IUD)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보람 감독은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라며 '생리 다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 후 김 감독은 생리컵을 비롯해 다양한 생리용품을 직접 체험해 본다.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 단순히 취재하는 것만으로 영화에 담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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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에서 생리컵으로 어찌 보면 '단순히' 생리용품을 바꿨을 뿐인데 김보람 감독의 몸에 점차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생리 다큐를 제작하고 있던 어느 날, 김보람 감독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큰 콤플렉스 중 하나였던 작은 가슴을 다시 보게 된다.

어느 날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거울에 비친 제 가슴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거예요. 가슴은 여전히 작았거든요. 문득 어? 개성 있어 보이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귀엽다고 해야 할까, 예뻐 보인다고 해야 할까. (188쪽)

이렇게 말하는 김보람 감독을 두고 정신과 의사 안주연씨는 "생리컵을 쓰면서 자기 몸과 친해져 남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몸을 본인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더불어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몸에 자신감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188쪽)고 전한다.

'단지 생리용품을 바꾸었을 뿐인데', 김 감독은 전과 달리 자신의 몸을 보다 긍정하기 시작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생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 스스로가 변화를 경험하니 어떻게 관객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대안용 생리용품은 면 생리대나 생리컵만이 아니었다. 울 탐폰, 해면 탐폰... 영화와 책을 통해 생전 처음 경험하는 물건들이었다. 나도 감독을 따라 당장이라도 일회용 생리대가 아닌 다른 생리 용품을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열띤 문장으로 여러 종류의 생리 용품을 소개하던 감독은 이렇게 덧붙인다.

"세상은 넓고 질 안에 넣어볼 것은 많다. 서둘러야 한다." (213쪽)

'피싸개'라니? 우리는 다 같이 변해야 한다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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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소방관이 개인 SNS 계정을 통해 여성들을 '피싸개'라고 조롱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피싸개'라는 말을 듣자마자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착잡한 기분이 퍼져 나갔다. <피의 연대기>가 개봉한 이후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인터뷰 기사 댓글에 달린 "'생리충'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멸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초경 파티' 같은 과도한 배려가 아니어도 좋다. 여성들은 대체 왜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할까. 여성을 '생리충'과 '피싸개'로 바라보는 남성에게서 과연 어떤 종류의 긍정적인 우정 내지는 연인 관계를 기대할 수 있을까. '피싸개'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몸에서 나오는 피를 처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이들이 과연 알기나 알까.

단숨에 <생리공감>을 읽어내리고 책을 덮자마자 나는 여성들을 향해 '피싸개'라고 부른 그 남성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이성애자인 여성이라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체로 자신의 몸에 대한 평가를 남성을 통해 먼저 듣게 된다. 작은 가슴이 콤플렉스였던 김보람 감독 역시 관계를 맺었던 남성에게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재확인했다고 말한다.

영화 <피의 연대기>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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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여성 스스로 자기 몸을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며 이는 결국 남성들도 변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김보람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상처를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서로의 상처에 귀 기울이면서 위로의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245쪽)

이 책은 그 방법을 찾아 나가는 하나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생리공감 : 우리가 나누지 못한 빨간 날 이야기>(김보람 지음 / 행성B 펴냄 / 2018.02 / 1만5천5백원)



생리 공감 - 우리가 나누지 못한 빨간 날 이야기

김보람 지음, 행성B(행성비)(2018)


태그:#생리공감, #피의 연대기, #생리 다큐, #생리 용품, #생리대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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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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