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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프로젝트 기획단원들이 광화문 시민문화제가 끝나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 세월호참사 프로젝트 기획단원들이 찍은 사진이다. 세월호 참사 프로젝트 기획단원들이 광화문 시민문화제가 끝나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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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4년이 지났다. 지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사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올해 2월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2014년에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기대했던 수준 이하의 대학교에 진학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과 강압적인 분위기의 학과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관심이 없었다. 그 당시에 나는 세월호 참사를 단지 바다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로 인식했다. 당시에 지방선거가 2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고 세월호가 정치인들의 진영논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나도 그 당시에 새정치민주연합에게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만 생각했을 뿐, 세월호 관련자들이 겪고 있을 고통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되어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 딱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렇게 투쟁을 한다고 해서 죽은 아이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제 정부를 향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위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에 연관된 단원고 학생들에게 대학 입시에서 특별전형을 신설해서 입시 특혜를 준다는 것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이제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동은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호 유가족들은 박근혜 정부에게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요구를 계속했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죽은 자식 팔아서 돈 받으려고 하는 것이냐"고 말하는 국민들도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리기사를 폭행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가면서 많은 국민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도 이 사건 이후에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마음을 닫았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다른 승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이 하는 행태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월호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게 된 계기는 2015년 4월 8일에 있었던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이었다.

 "1년 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2학년 허다윤 학생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여 오늘까지 엄마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윤이의 어머니는 신경섬유종이라는 난치병으로 청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내 딸의 뼈라도 껴안고 싶어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윤 야오가 함께 조은화, 남현철, 박영인 학생, 양승진, 고창석 선생님, 권재근 씨와 권혁규 군 부자, 이영숙 씨. 이렇게 9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은 "피붙이의 시신이라도 찾아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슬픈 소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희생자 295명, 실종자 9명, 그리고 생존자 172명을  남긴 채 1년 전의 세월호 참사는 온 국민의 가슴에 슬픔과 아픔, 그리고 부끄러움과 분노를 남겼습니다.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국가는 왜 존재합니까? 우리 정치가 이분들의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기술적 검토를 조속히 마무리 짓고, 그 결과 인양이 가능하다면 세월호는 온전하게 인양해야 합니다. 세월호를 인양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을 지키고, 가족들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이 연설을 보고 나서 나는 세월호가 조속히 인양되어 실종자들의 유해가 하루 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랬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광장으로 나가서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광장에서 집회를 하다가 경찰들에게 무력으로 진압당하는 것을 언론 보도로 많이 보았기 때문에 직접 참여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군대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괜히 집회에 참여했다가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찍혀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비겁하고 이기적인 선택을 했던 것 같다.

2016년에 입대를 해서 1년 9개월 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세월호에 대한 어떠한 소신도 피력할 수 없었다. 내 소신을 피력할 경우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영창에 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왜 정치적 쟁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부대에서는 세월호도 정치적인 쟁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할 때쯤 어떤 대외활동을 할지 고민하다가 우연히 대학생 세월호참사 프로젝트 기획단 추진위원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죄책감 때문에 기획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교가 있는 대전에서 기획단 활동이 진행되는 서울까지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자금, 체력이 많이 소모되겠지만 이 활동을 하지 않으면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갈 것 같았다. 내가 세월호 기억비 건립 프로젝트 활동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유가족을 만나서 인터뷰를 한 뒤, 오마이뉴스 기사로 작성한 것이다. 기사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주까지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캠페인 활동에 참여했다. 서울까지 이동하는경비가 많이 들어서 매주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금이 있을 때는 서울로 올라가서 캠페인 활동에 참여했다. 대학생 세월호참사 프로젝트 기획단 활동이 끝나고 저번주 금요일에 대학생 세월호참사 기억비 건립 대학생 추진위원 위촉장을 받는 것으로 기획단 활동은 모두 종료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해왔던 내가 고작 2개월 정도 되는 기간 동안 기획단 활동에 참여했다고 이걸 받아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되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위촉장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 특조위 2기가 출범했고 이번달에 첫번째 회의를 시작했다. 2018년이 끝나기 전에 진상규명이 모두 이루어져서 세월호 참사 5주기가 되는 내년 4월에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그:#세월호,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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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역사문화학을 전공한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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