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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 두문포구 종달리 두문포구의 새벽, 푸른 제주의 하늘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 김민수
2박 3일의 짧은 여정, 동행한 지인 중 한 분은 시력을 거반 상실했다. 그래도 바다에 서니 '푸른 빛'이 보인다고 했다. 바다와 오름, 거기에서 느껴지는 푸른 빛, 그 빛은 도시의 빛이 조금만 섞여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해요, 왜 여기선 푸른 빛이 보이질 않죠?"

신촌 보리빵 집 주차장에서 그는 물었다.

"여긴, 건물들이 많고, 인공의 색깔이 많네요. 그래서 푸른 빛이 사라졌나봐요."
곽지해변길 햇살과 바람과 파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몸으로 느껴지는 제주의 풍광 ⓒ 김민수
그랬다. 이전 그대로의 모습도 있지만, 제주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으며 도시화되어가고 있었다. 그 도시화의 뒤안길에는 자본의 음흉한 웃음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주에 어울리지 않는 각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한번 파괴되면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제주의 자연이 마구 파헤쳐지는 일이 있겠는가?
구엄리포구의 등대 하늘 빛에 따라 오묘한 빛깔을 내는 제주의 바다 ⓒ 김민수
낭만의 눈으로만 제주를 바라보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제주 역사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너무도 깊은 슬픔이 각인된 제주, 그것은 지울 수 없는 문신과도 같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난개발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무분별한 개발과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그곳에서 평생 살아오던 이들과 살아갈 이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오름 근처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흉측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포크레인이 다랑쉬오름 향하는 길 양 옆을 마구 파헤치고 있었다. 무엇을 지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굴착기에 부서지고 깎여나가는 제주의 산하는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수선화 개인적으로는 겹꽃 수선화보다 홑꽃 수선화를 좋아하지만, 이젠 겹꽃 수선화도 마냥 예쁘기만 하다. ⓒ 김민수
그래도 남은 것을 사랑해야지 어찌하겠는가? 겹수선화, 개인적으로 금잔옥대 홑수선화에 반해서 은근히 차별하던 꽃이었는데 새삼 아름답게 보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문득, '존재'란 무엇인가 묵상한다.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이유답게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고, 사랑받을 만한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 거짓과 탐욕같은 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의 사랑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투쟁의 대상일 뿐이다.
털머위의 이파리가 반짝반짝 빛난다. 그 사이로 난 길이 평온해 보인다. ⓒ 김민수
좁은 길. 생명에 이르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다.

문득, 제주 4.3항쟁 당시 3.3평의 작은 감옥에 남녀구분도 없이 35명까지 수용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3.2평 혹은 3.4평 독방에서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대통령들의 그 대우가 합당한 것인지 생각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라도 한다면 그 정도야 감수할 용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빠도 너무 질이 나쁜 저질스러운 이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이 나라의 윤리와 도덕과 기본적인 가치관들이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는가?

어쩌면 그런 사악한 기운들이 지난 10년간 제주도에도 어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난개발과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서울 도심과 다를 바 없는 각진 건물들의 행렬, 제주 바람소리를 느낄 수 없게 하는 중산간의 풍력발전기 소음들. 다 잘 살겠다고 한 일. 새마을 운동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려니 싶다.
유채 제주는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었다. 제주의 4월, 그 역사의 모든 아픔을 씻어내고 은 이렇게 화사한 빛으로 빛나길 바란다. ⓒ 김민수
그래도 여전히 피어나는 꽃들과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와 햇살과 제주임을 확증하는 것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감사하고, 아직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나는, 제주에 남아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제주를 지키기 위해 힘써온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빚진자다. 채무자의 기분, 늘 제주를 바라볼 때마다 그렇다. 개인적인 삶의 위중함을 핑계 삼아 제주를 떠났고,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했지만 아직도 개인적인 삶의 위중함을 핑계 삼아 육지에 머물고 있는 채무자. 그래서 제주가 그리워 그 품에 안겨도 홀로 여행을 하고 도망치듯 나오곤 한다.
광치기해변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광치기 해변, 그곳에도 4.3의 아픔이 여지없이 새겨져있다. ⓒ 김민수
제주 여행을 가기 전에 시력을 거반 상실했다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몸으로 느끼는 게 더 많아요. 바람, 파도, 햇살 모든 것이 그럴 거예요. 제주도 유일한 몽돌해안부터 갈 거예요. 그곳의 파도소리는 제주의 다른 바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날 거예요. 잘 기억해 두세요. 그 소리를."

그리고 나는 약속한 대로 바다 중에서 가장 먼저 '알작지 해변'으로 향했다. 파도소리를 듣게 하고, 몽돌의 부드러운 느낌을 만지게 했다. 작은 공깃돌을 주워 손에 쥐어주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돌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돌담과 바람 제주는 온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제주의 바람은 제주의 역사다. ⓒ 김민수
지인은 아직은 본격적인 고사리철은 아니지만, 고사리를 꺾고 싶어했다. 다른 일정들을 잠시 접고 고사리밭에 가서 고사리를 꺾었다. 제법 많이 올라왔다. 제주의 고사리를 본 적이 있는지라 내 눈엔 작아보였는데, 제주 고사리를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엄청나게 실한 고사리로 보였는가 보다.

한 시간여, 이 정도면 한끼 반찬을 해먹기에 충분하다며 더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사리를 꺾어 생계를 이어가는 분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까지 가지 않아서.
팽나무 제주 4.3 평화공원의 팽나무, 중산간지역이라 조금 늦게 새순이 올라오지만 기어이 새순은 풍성해질 것이다. ⓒ 김민수
조금은 망설여졌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제주 4.3평화공원을 택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한껏 제주 여행으로 달뜬 마음을 4.3항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정리하면 여행 전체가 무거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아주 좋았다. 제주의 아픈 역사, 그냥 말로만 듣고 오해했던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과 관심 밖에 있었던 제주역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진영논리 같은 것이 낄 틈은 없었다.

지난 10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나 그들과 한 뿌리인 자유한국당에서 70주년 4.3항쟁을 맞이하며 보여준 태도가 제주 4.3항쟁을 겪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비수였는지 실감했던 것이다.
청보리 청보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물결처럼 흔들린다. ⓒ 김민수
사실, 여행 첫날부터 여행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청보리밭'이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청보리밭은 '노란 유채와 청보리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검은 돌담이 어우러진'이었다.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만일 내 생에 기회가 주어져 제주에 정착하게 된다면 그런 보리밭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깨어나는 아침이면 돌담을 경계로 불어오는 유채의 노란 파도와 청보리의 초록 파도를 바라보며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의 4월, 꿈 같은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슬픔이 너무도 커서 아름다울 수록 슬픔의 깊이도 더 깊어졌다. 아름다운 만큼 슬픈 제주의 4월을 보고 왔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8-10일, 제주 여행길에 담은 사진들입니다.

태그:#제주도, #제주4.3항쟁, #봄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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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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