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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꾸려가며 사는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한옥과의 첫만남부터 고치고, 수선하는 과정을 담아갈 이 연재는 앞으로 공간의 완성, 그 이후 공간에서 만들어갈 일들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 기자말

경주 인근 양동마을 전경이다. 한옥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나는 그저 작고 소박하게 손바닥만 한 마당을 품고 있는 집이면 좋았다.
 경주 인근 양동마을 전경이다. 한옥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나는 그저 작고 소박하게 손바닥만 한 마당을 품고 있는 집이면 좋았다.
ⓒ 이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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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란 모름지기 이쯤은 되어야 한다고,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언감생심, 서울에서는 꿈도 못 꾼다. 나는 그저 기와의 선이 고운 집에서 작지만 하늘과 통하는 마당을 누리며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렀다. 아직 잔금을 치르기 전이고, 당연히 등기도 아직 내 이름으로 변경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프로젝트는 시작이 되었다. 아니, 시작은 아니고 사전준비의 시작이다.

아파트라면 어떨까. 새로 산 집에 원래 살던 분이 이사 나갈 날짜도, 내가 들어올 날짜도, 내가 살던 집에 또 들어올 분의 날짜도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저 집의 돈을 받아 이 집의 값을 치러야 이사가 가능하다. 때문에 아파트는 대개 생면부지의 사람들의, 물고 물리는 이사 날짜들이 정교하게 맞춰져야 계약이 성사된다. 오래된 아파트에 인테리어를 하고 들어간다면 이를 위해 잔금을 먼저 다 치른 뒤 가까스로 1~2주 남짓 비울 수 있다.

이번은 달랐다. 사시던 어르신이 이사를 하실 시간도 필요했고, 나 역시도 잔금을 치르기 위한 자금 조달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방안도 마련해야 했다. 살던 집을 정리해서 그 돈으로 새 집에 들어가는 거라면 비교적 간단하지만, 집을 사긴 했어도 이 집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를 설계한 뒤 서울시 심의를 받아야만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설계와 심의 기간은 기약할 수 없고, 그것이 다 마무리가 된 뒤라 해도 공사 기간만 적어도 5~6개월이 걸릴 터였다. 때문에 집을 사긴 했지만, 언제 이사를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살던 집에 계속 살아야 했다. 현금을 쌓아두고 산다면 간단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오래된 한옥을 살 때부터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냥 고쳐 살겠다고 해도 1~2주로는 가당치도 않지만, 서울시의 한옥심의를 거쳐 지원을 받기로 했다면 그 사전준비는 갈 길이 더 멀다. 매입금의 잔금은 은행의 도움이 필수였다. 잔금이 가능한 날짜를 당연히 나 혼자 정할 수 없었다. 은행이 '예스!'해야만 나도 '예스!'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또 은행만 바라보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진도를 나가는 게 '사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황측량' 신청이었다. 현황측량이란 쉽게 말해 건축물대장과 실제 집의 모양새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일치해야만 서울시 한옥심의를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건축물대장과 집의 모양새가 불일치해서 대장상으로는 이 집의 땅이 아닌 곳에 집의 기둥이라도 서 있는 날에는 매우 복잡해진다고 했다. 내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집을 사고 짓는 데 도움을 주시는 목수님께서 최대한 일반인의 용어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을 때가 많았다.

아니, 그보다 설명을 자세히 들을 의지가 없었다는 쪽이 맞다. 그 절차가 꼭 필요한 건지를 묻고 난 뒤에는 그 절차를 위해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신청하면 되는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직 집주인이 아니니 이전 집주인 어르신의 위임장을 받아, 해당구청에 가서 하라는 대로 앵무새처럼 뭔가를 신청하고, 입금하라는 곳에 입금하고(한국국토정보공사에 약 39만 원 남짓), 측량을 나온다는 안내 문자를 받고, 그날 그 자리에 가 있었다. 

주로 아파트에서만 살던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던 현황측량의 현장. 건축물대장과 실제의 집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게 되었다. 한옥 한 채를 샀는데, 전혀 알 수 없던 세상이 덤으로 같이 딸려오는 것 같았다.
 주로 아파트에서만 살던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던 현황측량의 현장. 건축물대장과 실제의 집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게 되었다. 한옥 한 채를 샀는데, 전혀 알 수 없던 세상이 덤으로 같이 딸려오는 것 같았다.
ⓒ 이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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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시간에 가보면 집주인이 있거나 없거나 저분들이 오셔서 측량을 하신다. 인사를 나누고 뭐 그럴 짬도 없다. 방해될까 봐 옆에 가지도 못했다. 그런 뒤 며칠 후면 신청서에 써넣은 내 메일로 측량 결과 문서가 도착한다. 이게 만일 어긋나면 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아예 심의를 신청할 수도 없다는데, 문맹자의 슬픔이란 이런 것이다. 메일로 첨부된 파일을 봐도 이게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해독 결과 다행히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제 한 고비를 넘겼구나, 싶지만 아직 고비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때가 무려 언제인가. 지난 7월의 일이다. 이때 거칠게 잡은 일정은 이랬다. 건축가를 선정하고, 집의 도면을 완성한 뒤 12월에 서울시 심의를 받고 2018년 1월에는 철거를 한다. 이후 공사를 진행, 3월에는 기와를 얹고 5월말에는 입주를 한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본 일도 그럴진대 해보지 않은 일은 더 그렇다. 하긴 나는 애초에 무슨 뜻이라는 걸 세울 수도 없었다. 집을 산 것도 워낙 뜻밖의 일이었고, 모든 상황이 급물살을 탄 것처럼 흘러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다고 뭐가 더 빠르게 진척이 되거나 안 될 일이 될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때부터 마음을 비웠다. 나의 자세는 하나였다.

에라, 모르겠다. 짧지 않은 인생에서 저런 자세로 살아본 적이 있었나? 결단코 없었다.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액션에 들어가는 게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그런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일 중에 가장 큰 대형사고를 쳐놓고 나서 나는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사람이 감당할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저지르면 마음이 오히려 담담해지는 걸까?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도면을 그리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고, 종로구와 서울시 행정 처리의 프로세스는 내 맘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내 손을 떠나 알아서 굴러가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기다리는 것,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대단히 의미 있는 전제가 있다. 이 프로젝트를 끌고 가주시는 목수님의 존재였다. 믿을 만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인생이 얼마나 편리한가를 온몸과 마음으로 깨닫는 날들이었다.

아직 사전준비의 호루라기는 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주택 구매의 파트너, 바로 은행을 찾았다. 그런데 내가 집을 사고 나자 어째 국가의 부동산 정책이 이상하게(?) 나와는 엇박자로 흘러갔다. 

단독주택을, 그것도 한옥을 짓는다고 할 때 주변에서는 뜨악해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대부분 그랬다.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서울에 아파트를 한 채 사지.' 그런 반응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이 엉뚱한 곳에서 꼬였다.

내가 집을 살 무렵 국토부에서는 집값을 잡겠다며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천명했다. 집을 한 채 가진 사람이 새로 집을 사는 경우 대출도 잘 안 해주고, 이전 집을 팔 때 양도소득세도 몽땅 물리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좀 억울했다.

약 9년 전쯤에 정말로 다주택자로 살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던 집을 팔고 지하철역 가까이로 이사를 하고 싶었다. 부동산 거래를 자주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 탓에 뭘 몰랐던 나는 살던 집이 팔리기 전에 이사갈 집 계약을 덜커덕 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사는 동네가 부동산 거래 절벽이었던 걸 나는 몰랐다. 살던 집은 팔리지 않았다.

팔려던 집을 전세로 내주고, 새로 산 집을 담보로 대출을 몽땅 받아 겨우겨우 이사를 했다. 그러고 2년이 지났다. 폭탄처럼 여겨지던 대출금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 사이 부동산 거래는 호전되었고, 이 지역에 앞으로 개발 호재가 있다고들 했다.

아파트 한 채를 더 가지고 있으면 돈이 된다고들 했다. 그런데 나는 곁눈질도 안하고 전세로 내놓았던 집을 과감히 팔았다. 살 집 한 채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들 혀를 끌끌 찼다.

실제로 그때 판 집은 값이 훌쩍 뛰었다. 내게 혀를 찬 사람들의 말이 맞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부동산값의 폭등은 장기적으로 모두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주택자의 길을 외면한 나인데!

그렇게 '순정'한 마음으로 집 한 채 가진 걸 감사히 여기며 살다가, 주머니에 돈이 모이는 족족 대출금 갚아나가며 살다가, 오랫동안 품은 꿈 한 번 이뤄보겠다고 한옥을 샀는데 느닷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가 나를 다주택자라는 이름으로 몰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집값을 잡아야 한다는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왜 하필 이때?

이런 심정이었다. 새로 산 집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고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면 이 집에 담보 설정이 되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살던 집을 팔고 움직이면 간단하지만, 한옥이 고쳐질 때까지 어디선가 살아야 하니 당장 집을 팔고 이사를 할 수도 없었다. 거금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니 한옥 매매 대금의 잔금을 치르려면 살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서울과 신도시를 중심으로 규제 지역이니 뭐니 해서 다주택자에게 신규 대출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매일매일 쏟아지고 있었다. 2018년 4월 안에 집을 팔면 양도소득세 중과를 좀 봐준다는데 나는 팔고 싶어도 그때까지 팔 수도 없었다.

매일매일 계산기를 붙들고 살았다. 이럴 경우, 저럴 경우의 수를 다 불러모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잔금 날짜는 다가오는데 숫자를 맞출 방법은 전무였다.

'감당도 못할 욕심을 부려 망하는 거 아냐?' 내심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심정으로 방법을 찾아보려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거래하던 은행을 찾아가 솔직하게 상황을 말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방법을 찾아달라고 했다. 타이밍이란 이런 것이다. 폭풍 전야처럼 뭔가 터질 듯 터질 듯 새로운 규제가 내려올 듯 말 듯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내 입장에서만 보자면 매일 조금씩 뭔가 압박이 시작되고는 있었지만 아직 결정타는 당도하지 않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서 정작 내가 은행을 찾았을 때는 내일은 어찌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오늘대로 하면 되는 타이밍이었다. 비록 원래 예상했던  대출 가능 액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처음 상담 창구를 찾을 때는 담당 과장님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던 내가 차근차근 설명을 들으며 마음이 놓이자 나도 모르게 허리를 의자에 편히 기대고 앉아 속 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제 집 가지고 이자 내가면서 대출 받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이런 '재수없는 발언'을 남발하면서. 그러나 상담 창구 과장님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심사를 거쳐야 하고, 실제로 이 집에 내가 살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해야 하고... 등등등등 절차를 설명하며, 안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고 며칠 동안 또다시 지지고 볶는 날들이었다. 될 경우, 안 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누군가의 처분만 바라며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절감했다.

며칠 뒤 통장에 경험하지 못한 동그라미를 달고 있는 숫자가 찍혔다. 일, 십, 백, 천.....하고 동그라미를 세어가며 금액을 확인했다. 은행에서 만난 상담 창구 과장님의 "예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예스!"하고 외쳤다. 그 숫자는 집주인 어르신의 통장으로 순식간에 이체되었다. 높은 고비 하나를 이렇게 넘겼다.

그리고 나는 현재 1가구 2주택자가 되었다. 정부에서 고강도로 주시하고 있는 바로 다주택자가 된 셈이다. 살지 않는 집은 좀 파시라, 국토부 장관께서는 말씀하셨는데 나는 새로 산 집은 당장 들어갈 수도 없고, 갈 데가 없으니 살던 집을 팔 수도 없어 대략 난감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집이 다 고쳐진 뒤 이사할 무렵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 하루 별일 없으면 그걸로 되었다.

내가 한옥을 산 이후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아파트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그럴 돈 있으면 아파트나... 하던 분들의 끌탕도 현재진행형이다. 뭔가 한옥 짓는 일의 진척이 더뎌 보일수록 끌탕의 데시벨도 높아진다. 사람은 누구나 오기라는 게 있다. 멋지게 집을 짓고 말겠어! 어디 한 번 해보는 거야! 누구를 향한 건지는 모르지만 허공을 향해 두 주먹 불끈 쥐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다.(https://blog.naver.com/hyehwa11-17)



태그:#작은한옥수선기, #한옥수선, #현황측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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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지금은 혜화동 인근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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