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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미랑재에서 북쪽을 향해 낙동정맥 24구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지난해 10월 21일, 23구간을 종주한 이후 다섯 달 하고도 열흘이라는 긴 공백이 생겼고, 그 사이에 계절은 가을에서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지나 봄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다섯 달 넘게 살랑살랑 평지를 걷기만 했던 제 두 다리는 애미랑재에서 시작하는 경사 급한 산길을 만나자마자 후들거리고 휘청거렸습니다. 한 주일만 산행을 걸러도 다리가 먼저 그 사실을 알 텐데, 다섯 달 이상을 쉬다시피 했으니 제 다리는 산행에 대한 감각을 거의 잃어버렸나 봅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제가 생각보다 힘들게 산행을 한 데 비해 함께 산행에 나선 아내는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아내 역시 힘든 기색이 나타났지만 인내심을 갖고 한 걸음씩 차분하게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흔하디 흔한 풀 사초도 꽃을 피웠습니다. 고개를 쳐든 모습이 바깥 세상이 궁금한가 봅니다.
 흔하디 흔한 풀 사초도 꽃을 피웠습니다. 고개를 쳐든 모습이 바깥 세상이 궁금한가 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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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다리는 산에 대한 감각을 되찾느라 애를 먹었지만, 발바닥은 푹신한 산길의 감각을 금세 되찾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채 물기를 적당히 품고 있는 숲길은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워 밟기조차 조심스럽습니다.

나뭇가지에서 새잎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풍경을 바라보느라 눈동자는 이쪽저쪽으로 바삐 움직였고, 촐싹거리며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의 쫑알거림은 귓속을 간질렀습니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은 또 어떤가요. 차갑지도 후덥지근하지도 않은, 땀에 젖은 얼굴에 와 닿는 적당히 서늘한 바람은 봄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계절상품입니다.

오감으로 맞는 산과 봄의 정취

눈으로, 코로, 귀로… 그리고 얼굴과 발바닥으로 들어오는 산과 봄의 감각들은 머릿속에서 섞이고 한데 어우러지면서 처음에는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다가 이내 가슴이 벅차도록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눈이 흐물흐물해지고 입은 헤~ 벌어지는 제 표정은 즐거움을 어쩌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무는 때때로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우리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요건 엄마 자궁 속에 있는 아기 모습 같습니다.
 나무는 때때로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우리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요건 엄마 자궁 속에 있는 아기 모습 같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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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아직 꽃은 많지 않습니다. 생강나무에서 노란 꽃이 피어나 숲을 환히 밝혀 주고, 앙증맞은 제비꽃이 한두 송이 땅바닥에 바짝 붙어 피어나는 정도입니다.

산수유와 구분하기 힘들 만큼 꽃 모양이 비슷한 생강나무는 몸에서 진한 생강 냄새가 나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작은 가지를 잘라서 잘린 부분을 코에 갖다 대면 생강 냄새가 "숑~" 하고 올라옵니다. 알싸하지만 부드러운 냄새가 영락없이 생강차에서 나는 기분 좋은 생강 향기입니다.

생강나무꽃은 노란 형광색으로 피어나 숲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작은 가지를 꺾어 코에 대면 생강차 향기가 "숑~" 하고 솟아납니다.
 생강나무꽃은 노란 형광색으로 피어나 숲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작은 가지를 꺾어 코에 대면 생강차 향기가 "숑~" 하고 솟아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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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순이가 생각나는 생강나무꽃

생강나무를 강원도 사람들은 동백나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동백나무 씨에서 얻은 동백기름을 여자들이 머리에 발랐다고 하는데, 추워서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 씨에서 짜낸 기름을 동백기름 대신 여자들이 머리에 발랐습니다.

생강나무가 동백나무 역할을 대신 한 것인데, 그러다가 아예 이름까지도 동백나무라 불렀나 봅니다. 고향이 강원도 춘천인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나'를 자빠뜨린 뒤 함께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힐 때 나오는 동백꽃이 바로 이 생강나무꽃입니다.

애미랑재에서 시작해 숨이 꼴깍 넘어갈 만큼 가파른 된비알을 2㎞쯤 올라가서야 산길은 성질을 죽이며 얌전한 오솔길로 바뀝니다. 가파른 만큼 당연히 속도가 더디니 2㎞ 오르는 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렸습니다.

이 고갯길은 영양과 봉화, 울진 경계에 있어서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 애매하다 하여 애미랑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애미랑재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이 고갯길은 영양과 봉화, 울진 경계에 있어서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 애매하다 하여 애미랑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애미랑재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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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걷고 있는 산길은 행정구역상 울진군 금강송면에 속합니다. 원래 이름은 서면이었는데 2015년에 금강송면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요즘은 지역 특성에 맞게 면 이름을 바꾸곤 합니다. 대관령 고개 위에 있는 평창군 도암면을 대관령면으로 바꿨고, 강이 흐르며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은 영월군 서면은 한반도면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곳 금강송면은 아름에 걸맞게 쭉쭉 뻗은 금강송과 수없이 맞닥뜨립니다. 거북등 같은 나무껍질이 붉은 빛을 띠어서 적송이라고도 부르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입니다. 재질이 좋아서 옛날에 힘깨나 쓰는 양반들의 집은 모두 이 금강송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금강송 한 그루에 탄성 한 마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난 뒤 저 위에서 가지를 쫙 펼치는 금강송을 만날 때마다 "와~ 멋있다!" 하는 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보고 또 봐도 웅장하고 도도한 자태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기도 하고, 두 팔을 벌려 감싸 안으며 금강송의 정기를 받아 보겠다고 눈을 지그시 감기도 합니다.

연신 감탄사가 터지게 하는 금강송의 우람한 자태입니다. 적송이라고도 부르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입니다.
 연신 감탄사가 터지게 하는 금강송의 우람한 자태입니다. 적송이라고도 부르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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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온함을 느끼던 산길은 통고산에 접근하면서 다시 가팔라집니다. 20년쯤 산행을 즐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편하기만 했던 산행은 제 기억에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평탄했던 길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급하게 올라갔다가는 절벽처럼 떨어지기도 합니다. 꽃길에서 호사를 누리듯 살랑살랑 걷다가 바위를 만나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이더니 내려가는 길에서는 낙엽을 밟아 미끄러지며 모양새를 구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산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만과 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산을 대하면 산도 우리를 너그럽게 받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통고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멋진 정상석이 서 있습니다. 통고산… 한자로 '通古山'이라 쓰여 있습니다. 옛날로 통하는 산? 언뜻 그런 생각도 들지만 정상석 뒷면에서는 통고산 이름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부족국가시대 실직국 왕이 다른 부족에게 쫓기어 이 산을 넘으면서 통곡하였다 하여 통곡산으로 부르다가 그 후 통고산으로 불리고 있다."

통고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실직국 왕이 통곡했다 하여 통곡산으로 부르다가 뒤에 통고산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통고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실직국 왕이 통곡했다 하여 통곡산으로 부르다가 뒤에 통고산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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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국은 통고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었던 작은 나라입니다. 실직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다가 패하자 도망쳐 나온 왕이 이 산을 오르며 대성통곡했다는 얘깁니다. 나라를 잃고 왕권을 잃은 채 산속으로 도망치려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도 왕건에게 권좌를 빼앗긴 뒤 도읍 철원에서 도망쳐 나와 명성산에 이르며 대성통곡을 했나 봅니다. 그래서 산 이름이 명성산(鳴聲山)이고, 우리말로는 울음산입니다. 신라가 망한 뒤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역시 금강산을 향해 가다가 하늘재를 넘으며 설움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오늘 유난히 겨우살이가 눈에 많이 띕니다. 몸에 좋다고 사람들이 채취해 가서 도시 인근 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오늘 유난히 겨우살이가 눈에 많이 띕니다. 몸에 좋다고 사람들이 채취해 가서 도시 인근 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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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서 쫓겨난 뒤 대성통곡

권력을 잃는다는 것은 무척 서러운 일이고, 대성통곡까지 하게 되나 봅니다. 촛불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박근혜 전 대통령도 서러움이 북받쳐 남몰래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집니다.

권력의 맛은 참으로 달콤한가 봅니다. 그러니 크든 작든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토록 기를 쓰는 것이겠지요.

"권력은 도취적이다."

40년 전, 정치학 개론 강의 첫날 이극찬 교수는 올백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며 한 구절을 읊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권력은 마약에도 비유합니다. 한 번 손대면 본인 의지로는 떼지 못합니다.

낙동정맥 마루금은 때로는 이렇게 편안한 오솔길이 되어 우리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줍니다.
 낙동정맥 마루금은 때로는 이렇게 편안한 오솔길이 되어 우리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줍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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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고산 정상을 지나면 대체로 내리막길입니다. 노년이라는 인생의 내리막길이 욕심을 버리고 나면 편안해지듯이 정상을 지나면 맞게 되는 산행의 내리막길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도 나를 바꿔 갈 결심을 한 가지 해 봅니다. 한 구간에 한 가지씩 결심을 했으니 벌써 스물네 번째 결심입니다.

결심 24 / 격동의 현대사 현장을 한 곳씩 찾으며 나태해지고 무뎌지는 정신을 바로 세우려고 합니다.(제주도 4․3민중항쟁 유적,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잠든 봉하마을, 수많은 의인이 고초를 당하고 죽어 간 서대문형무소, 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세월호가 누워 있는 팽목항, 박종철 열사가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 촛불혁명 중심지 광화문광장)

♤ 낙동정맥 24구간 종주
날짜 / 2018년 3월 31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양군, 울진군
날씨 / 모처럼 맑음
산행 거리 / 13.2㎞
소요 시간 / 7시간
산행 코스(북진) / 애미랑재 → 937.7봉 → 통고산 → 894봉 → 산불감시망대 → 답운치
동행 /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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