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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주기
등록 2018.04.20 10:04수정 2018.04.20 12:35
어릴 적엔 형 따라 학교 가면 재밌을 줄 알았다.
학교 다닐 적엔 대학만 가면 살판 날 줄 알았다.
대학교 땐 사회 나가면 뭐가 될 줄 알았다.
군대 있을 땐 제대만 해보라고 별렀다.
연애할 땐 결혼생활이 이럴 줄 몰랐다.

글쓰기에 나중은 없다.
기다린다고 써지지 않는다.
일단 시작해야 한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첫 문장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제를 정하는 것으로 착수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개요부터 짠다. 보고서 같은 경우는 중간제목을 써보는 것도 방법이다. 글감, 즉 소재를 나열해본다든가, 마인드맵을 그려보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단어나 문장을 열거해보기도 한다. 모두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학교에서는 글 쓸 때 먼저 개요부터 짜라고 가르친다. 설계도를 그리고 집을 짓는 방식이다. 글의 얼개, 짜임, 구성, 개요, 전개를 만들어놓고 쓴다. 쓰기의 정석이다. 글에도 생명이 있다면 이는 창조론에 가깝다. 개요를 짠다는 것은 글의 처음과 끝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요를 짜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먼저 쓰고 시작하기도 한다. 일관성 있고, 논리가 분명하며, 뺄 것도 빠진 것도 없는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이런 글쓰기를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전체 그림을 그릴 자신이 없고, 그리지도 못한다. 책을 쓸 때도 목차를 정해두고 쓰지 않았다. 나는 진화론 쪽에 서 있다. 내게는 적자생존의 선택밖에 없다. 더 나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고치면서 몸부림칠 뿐이다.

개요를 짜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요는 쓰다 보면 무너진다. 멋진 설계도를 그려도 집 지을 자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재를 찾다 보면 좋은 것들이 많아 설계도와 다른 집을 지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자료를 찾다 보면 겪는 일이다. 그리되면 설계도를 그린 시간이 아깝다. 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 계획표 짜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 된다. 논문, 논술이면 모를까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첫 줄부터 쓰는 사람도 있다. 첫 줄에 따라 다음 줄을 쓴다. 자동차 조립 방식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부품들이 하나씩 덧붙어져 생산 라인 끝에서 완성차가 만들어진다. 기발한 첫 줄이 떠오르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문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핵심 주제문을 쓰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밝히고, 근거를 대는 방식이다. 첫 단추를 못 끼우면 백지의 공포를 경험해야 한다. 첫 문장의 벽을 성공적으로 뚫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문장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영감은 누구에게나 마구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일필휘지하라는 주문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누더기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또한 못마땅하다. 일필휘지하란 말은 두 가지 요구를 담고 있다. 그 하나는 첫 줄부터 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에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생각나는 것부터 쓰면 안 되는가. 조금씩 여러 번에 걸쳐 쓰면 안 되는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내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머릿속에 있는 것을 종이나 컴퓨터 화면 위에 쏟아놓고 요리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은가.

생각을 글로 쏟아놓고 보면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머릿속 생각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일필휘지는 특별한 능력이긴 하지만, 원고지에 글을 쓰던 시절에나 유용했다. 그때는 일필휘지가 안 되면 애먼 원고지만 구겨야 했다. 쓰다가 막히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니까. 지금은 그럴 일이 없다. 컴퓨터에서 얼마든지 편집이 가능하다. <혼불>을 쓴 최명희 선생은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영감은 누구에게나 마구 떠오르지 않는다. 직관, 통찰, 혜안 역시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그런 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것들이다.

나는 일단 뭐라도 쓴다. 주제건, 첫 문장이건, 전하고 싶은 한 줄이건 상관없다. 생각나는 것을 쓴다. 물론 쓰다 보면 생각이 바뀌고, 처음 쓴 글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써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언가 써놓아야 하는 이유는 많다. 우리 뇌는 일단 시동이 걸리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 뭔가를 시작해야 비로소 해당 부위가 활성화된다. 그 일에 더 몰입할 수 있는 의욕을 만들어낸다. 독일 정신의학자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이 이름 붙인 '작동흥분이론'이다.

글을 써야 한다면 제목이라도 써놓자. 뇌를 작동시키지도 않고 계속 미루면 끝내 못 쓴다. 시동을 걸어야 한다. 상사에게 문서 작성 지시를 받거나, 써야 할 글이 생기면 쓰기를 미루지 말고 생각나는 것을 뭐라도 쓰자.

일단 쓰기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자이가르닉 효과' 때문이다.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이 식당에 갔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종업원들은 어떻게 복잡한 식사 주문을 외워서 서빙할 수 있을까. 자이가르닉 효과는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 뇌는 진행 중인 일,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끊임없이 생각하여 잊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나 실패한 일을 오래 기억한다. 언젠가 완수하기 위해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몇 줄이라도 써놓으면 뇌가 혼자 쓰고 있다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글을 매듭짓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문득 던져준다. 길 가다가, 다른 일을 하다가도 써야 하는 글과 관련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내가 떠올리려고 해서 떠오른 게 아니다. 뇌가 혼자 알아서 한 일이다.

실제로 우리 뇌는 '패턴 완성'(Pattern Completion) 기능이 있다. 몇 자라도 써두면 그것을 완성하려고 한다. 바둑 포석 놓듯 듬성듬성 써보라. 미처 채우지 못한 공간은 뇌가 알아서 채운다. 우리 뇌는 글에 존재하는 질서를 알고 있다. 여백을 채우는 인지적 완성 능력이 있다. 관련성 깊은 단어보다는 관련 없는 단어를 열거해두면 빈칸을 더 섹시하게 메워준다.

특히 나같이 소심한 사람에게는 효과 만점이다. 나는 강단이 없는 대신 강박이 있다. 써야 하는 글이 있으면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한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원고 마감일을 어기는 배짱도 없다. 마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블로그에 하루 하나씩이라도 글을 올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올릴 거리가 생각나지 않아도 초조하다. 또한 한 줄을 적어놓으면 그것이 아까워서 그만두지 못하고 완성하려고 한다. 그런 강박 덕분에 매일 글을 쓴다.

쓸거리는 써야 나온다

뭐라도 써놓으면 글쓰기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쓸까 말까 망설이면 뇌의 편도체가 공포반응을 일으키고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뭔가 써놓으면 그것에 살을 붙이고 어찌어찌하면 될 것 같은 희망을 갖는다. 불안과 초조는 창의적 생각을 방해한다. 써놓은 몇 줄에 살을 보태면 되겠구나 하는 안도가 오히려 창의와 의욕을 북돋운다.

글쓰기는 불확실성이 가장 큰 악재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공포와 불안이 극대화된다.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될까 봐 쓰기를 망설인다. 불확실한 상태로 놔두고 싶어 한다. 그럴수록 불안감은 가중된다. 불안과 공포는 불확실성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불확실성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라도 쓰는 것이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불안감이 잦아든다. 그 이전의 생각은 부질없는 걱정이 된다. 한 발 들여놓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일단 써야 하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쓸거리는 써야 나온다. 쓸거리가 있어서 쓰는 게 아니고 쓰면 쓸거리가 생각난다. 처음 쓴 몇 줄이 실마리가 되어, 그것을 단서로 엉킨 실타래가 풀려나간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오고, 글이 글을 써나간다. 나는 인생 기회가 두 가지 통로로 온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도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다. 시도하지 않으면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그 일이 다른 기회를 가져다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한 줄을 쓰면 그다음 줄이 만들어진다. 쓰면 써지는 게 글이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일단 쓰는 게 좋다는 데에는 동의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가.

첫 번째로 권하고 싶은 방법은 배짓기 방식이다. 선박은 부분 부분을 만들어 도크에서 합체하는 방식으로 건조한다. 글도 독립적인 문단을 여러 개 써서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쓸 수 있다. 전체 구성은 신경 쓰지 말고 오직 한 문단에만 집중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쓴다. 모든 문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 그 하나를 향해 나아간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두 가지 이상이거나 길고 복잡하면 다른 토막으로 나눈다. 문단은 하나의 짧은 글이므로 그것을 쓰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대신, 문단 하나가 벽돌같이 견고해야 한다. 그 자체로 완성된 글이어야 한다. 주제문이 명확하고, 그 주제문을 다른 문장들이 잘 뒷받침해줘야 한다. 문단 안의 문장들은 긴밀하고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한다. 또한 글의 분량에 필요한 만큼 문단을 만들어야 한다.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숫자만큼의 벽돌을 만드는 것과 같다. 짧은 글은 한두 문단, 긴 글은 열 개 전후의 문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문단으로 분량을 채워서도 안 된다.

문단이 만들어지면 다음은 문단의 순서를 정하는 일이다. 구성 작업을 할 때는 포스트잇을 사용하는 것도 좋다. 포스트잇 하나가 문단 하나다. 포스트잇마다 그 문단의 중심 내용을 단어나 문장으로 쓴다. 순서를 바꿔가며 포스트잇을 붙여보는 것이다. 문단 중심 글쓰기는 표현과 구성, 즉 쓰기와 구조 짜기를 분리하여, 먼저 쓴 후에 구조를 짜는 방식이다. 하나씩 시행하므로 훨씬 수월하다. 긴 글을 써야 하는 부담에서도 자유롭다.

단, 나중에 아무리 꿰맞춰도 문단 간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어렴풋이나마 글의 전체 모양을 염두에 두면서 문단을 만들어야 하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문단 개수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연재도 내 블로그와 홈페이지에 이미 써놓은 2천 개 넘는 문단의 조합이다.

글쓰기는 실패와 재시도 거듭하는 과정

내가 즐겨 쓰는 것은 블록 쌓기 방식이다. 어린아이가 레고 블록을 잔뜩 놓고 요리조리 조립해보는 것과 같다. 브레인스토밍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의 글쓰기 블록은 문장이다. 더 작게는 단어나 문구다. 나는 글에 꼭 들어갔으면 하는 문장이나 단어를 두서없이 채집한다. 그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본다. 그러다 보면 자동차도 만들어지고 집도 지어진다.

이 방식은 기본 재료만 충분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얼마나 다양한 블록을 갖고 있느냐가 성패를 가름한다. 내가 블록, 즉 문장을 확보하는 방법은 아는 것부터 쓰는 것이다. 뇌는 새로운 것을 보면 긴장한다. 뇌가 놀라지 않도록 생각나는 것부터 쓴다. 또한 수시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보탠다. 내 머릿속이나 자료에 있는 콘텐츠를 분해해서 블록을 만든다. 그것들은 기존 용도에 맞게 조립돼 있기 때문에 풀어헤친 후 내게 필요한 것만 가져온다.

이는 마치 내가 원하는 모양과 성능의 차로 재조립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탔던 차를 분해하여 내게 필요한 부품을 가져오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 축적한 문장의 양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글이 된다. 어느 문장은 전체 글의 주제문이 되고, 어느 것은 소주제문, 뒷받침문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러다 보면 첫 줄도 만들어지고, 마지막 줄도 채워진다.

미국의 톰 우젝(Tom Wujec)이란 학자가 고안한 '마시멜로 챌린지'라는 게임이 있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스파게티 면과 실, 테이프를 사용해 18분 안에 탑을 쌓는 게임이다. 서로 다른 6개 팀이 구성돼 게임을 벌인 결과, 유치원생이 포춘 50대 기업 최고경영자나 변호사, MBA 학생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왜 그랬을까. 대부분 팀은 리더를 정하고, 탑의 구조와 계획을 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특히 꼴찌를 한 MBA 학생들은 완벽한 방법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이에 반해 유치원생들은 호기심을 갖고 일단 쌓기 시작했다. 레고 블록을 쌓듯 어림짐작으로 좌충우돌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다 우연히 성공하면 그 방식에서 얻은 감각으로 조금씩 모양을 개선해나갔다. 글쓰기가 꼭 그렇다. 실패와 재시도를 거듭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일단 쓰기 시작해야 한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공부를 시작해야지, 책상 정리하고 계획만 짜고 있으면 되겠는가.

나는 아내와 겨루지 않는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토 달거나 말대꾸하지 않는다. 결코 도전하지 않는다. 십여 년 전부터 아내는 TV 리모컨을 '모컨이'라고 명명했다. "모컨이 줘봐", "모컨이 어딨어?"라고 하면 아들과 나는 늘 대령했다. 하루는 내가 '리모'라는 상큼한 이름을 지었다. "리모 주세요." 그러나 아내나 아들이나 들은 척도 안 했다.
"내가 이런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리모컨이 당신 전유물이야? 왜 당신만 갖고 있는 건데?" "그럼 안 돼?"
"아니, 갖고 있으려면 광고 나올 땐 제대로 돌려주든지."
"뭐? 이걸 확~"
다행히 리모컨이 빗나갔다.

오늘도 나는 성경 한 구절을 필사해서 아내에게 검사받는다. 숙제하기 전이 귀찮고 괴롭지, 막상 쓰고 나면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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