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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갈등하고 불화하는 '위기의 주부' 이야기입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번뇌를 글로 풀어보며 나의 언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편집자말]
우리 집엔 태어난 지 만 4년 된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툭하면 울고 소리 꽥꽥 지르고 먹다가 뱉어내고 쉴 새 없이 어지르며 모든 것을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 그 상전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두 명은 배고프려나, 까불다 넘어지려나, 감기 들지 않을까 전전긍긍. 천방지축 상전에게 시달리면서도 귀엽다고 물고 빨고 하는 걸 보면, 이 사람들, 아무래도 뭔가에 단단히 씌었다.

"쪼그만 것에게 쩔쩔맨다."

부모님은 남편과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아이를 사랑하는 '다른 방법'을 우린 배우지 못했다. 맞춰주고, 받아주며, 먹이고, 재우고, 놀아줬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런 양육 태도를 '유난 떤다'고 하거나 '부모가 권위를 찾지 못해서'라고 꼬집겠지만, 약간의 정도의 차이일 뿐, 이 말엔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보호하고 지켜주고 사랑을 '듬뿍' 줘라.' 그 누구, 이 숭고한 사랑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무관심 속의 아이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라지(Georges Laugee)의 Le repas des moissonneurs(1876)
 프랑스 화가 조르주 라지(Georges Laugee)의 Le repas des moissonneurs(1876)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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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아니었다. 현대의 부모들과 달리 전 근대 농촌 사회에서만 해도 아이들에 대한 유별나고 지극한 관심은 매우 낯설고 생소했다. 아이들은 단지 어른의 축소판일 뿐이어서 아이라는 이유로 배려받거나 보호받지 않았다. 자식도 '경제적'인 이득 때문에 낳았는데, 서민들에겐 노동력이었고 귀족들에겐 가문 유지에 필요한 자손이었다. 적절한 피임도 할 수 없었고 유아사망률도 높았기에 일단 낳고 봐야 했지만 때로 너무 많은 자식들은 부모에게 '짐'이었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기도 했다.

아이들에 대한 기본 태도는 '무관심'으로, 따로 들이는 금전적 비용과 시간은 없었다. 아이들은 밭일과 들일 사이에서 방치된 채 부모의 일을 같이 나눠 하며 커갔다. 부모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기질은 어떤지, 말은 느리지 않은지 하며 발달을 헤아리는 일도, 아이들과 감정적으로 얽혀들 여유도 없었다.

지금처럼 엄마 한 명이 아이를 온종일 끼고 있는 경우 역시 없었다. 건강한 젊은 여성은 너무도 귀중한 노동력이었기에 아이 돌보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었다. 옛날이야기 같지만 불과 30~40년 전 한국 농촌사회에서 나의 큰어머니가 오 남매를 키운 방식이기도 하다. '육아'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였다.

특정 연령대를 '아동'으로 부르며 어른과 구분하고 특별한 보호와 관심을 주기 시작한 건 서구에서도 백 년도 되지 않는다는 것. '근대의 기획'으로 탄생한 노동자, 주부, 회사원, 청소년, 학생... 이 모든 단어처럼 '아동'에게도 연령과 위치에 맞는 표준적인 행동과 과업이 주어졌고 부모들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의식적인 육아의 등장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굳건하게 유지해주던 종교와 전통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신분제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할 '의무' 역시 떠맡게 되었으니, 그 중심에 '교육'이 있었다. '배워야 산다!' 타고난 신분을 극복할 가능성이 열린 만큼 아이들의 결함은 더 이상 신의 실수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도 아니었다. '자식의 단점을 교정하고 특기를 찾아주고 증진시켜라, 그것이 바로 부모인 당신들이 해야 할 의무이다!'

이제 자식의 의식주 해결은 기본일 뿐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신체, 인지 발달을 위한 장난감, 책, 교육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주기적으로 갱신시켜줘야 하고, '예의 바르고 밝은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들의 정서를 늘 예의주시하고, 부모 자신의 태도와 말투도 검열해야 한다.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인생 개조 프로젝트'에는 태아, 신생아, 영아, 유아, 소아, 어린이로 분류된 각 연령에 따른 발달 과업이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속에 우리가 빠진 함정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교육은 더 나은 인생,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게 할 방법이면서 사실상 산업 사회에 적합한 노동자(일꾼, 좋은 말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훈육에 목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한 모든 노력의 뒷면엔 '성과에 대한 압력'이 자리한다.

언제 걷고 말하느냐부터, 언제 문자를 습득하고 책 읽기가 가능한지,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원만히 맺는지가 일종의 육아 '성과' 지표처럼 여겨지게 되고, 표준적인 발달 기준에 못 미칠 경우, 아이에게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하자가 있는 건 아닌지도 유심히 봐야 한다.

자식의 전문가가 되어라

요즘 엄마들처럼 나 역시 아이 기르기에 관해 겪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나의 아기를 만났다. 나의 아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잘 키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엇갈렸다. '정성스럽게 이유식을 만들어주면 편식 없는 식습관이 잘 잡힐까?', '단호하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면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을까?'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를 순한 양처럼 길들였다는 엄마들의 간증과 육아서의 정보를 취합해보면 모든 건 나의 잘못이었다.

양육지침을 주도하는 발달 심리학의 가설들은 일생의 첫 몇 년을 놓치면 평생 발전할 기회를 잃는 거라 했고 엄마만이 애착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기에, 나는 어린이집에 일찍 보낸 것에도 늘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모든 부모 교육과 육아 정보,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엄마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아이의 기질, 식성, 체질, 발달 사항을 면밀히 관찰하고 파악해서 적절한 양육 기술과 태도를 행해야 하지만,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난 아직 내 자식을 모르겠다. 기관지가 약하고, 활동적인 놀이를 좋아하지만 겁도 많고, 미술에 적성이 있는 거 같기도 한데... 육아·의학·심리학 지식들은 계속 갱신되고, 새로운 학습법, 갖가지 상품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기에, 내가 아이에 대해 알아야 할 것과 아는 것의 간극은 계속 벌어진다.

더군다나 때맞춰 먹이고 재우는 일에 정성을 들임에도 두 돌 무렵 지인이 물려준 전집 이외에 새로운 책을 읽어주지도 않고, 다섯 살 아이들이 슬슬 익혀간다는 한글은 시작조차 안 했으며, 과자나 가공식품도 잘 먹이고, 유튜브도 자주 틀어주며, 때로 아이에게 소리도 지르는 나는, 다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방치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육아는 항상 쌍방 관계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과학의 정복'은 엄마에 대한 정복이기도 하다. 이론들의 그물이 아이에게 던져지지만 엄마들이 그 안에 붙잡힌다." -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p228

거절할 수 없는 명령

모든 부모 교육과 육아 정보,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엄마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모든 부모 교육과 육아 정보,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엄마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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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충고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온갖 매체에서 쏟아내어 일상 깊숙이 침투하는 '절대명령'을 보란 듯이 거부할 수 있을까. 그 메시지들은 "아이의 요구를 무시하면 아이에게 해를 줄 것이고 아이가 삶에서 성공할 기회를 망치는 것이라는 후렴을 반복"(위의 책, p229)하고, 메시지를 거절하는 부모들에겐 힐난과 비난이 돌아온다. '아이를 방치한다.' '부모가 저 모양이니 애가 저렇지.'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비정하거나 독하거나 나태한(그렇게 보이는) 엄마'들 혹은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나 주변관계를 끊는 엄마들만이 이러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쩔쩔매면 유난스럽거나 예민한 엄마라고 한다. 그래서 예의 곁들이는 조언을 보면 관심과 사랑으로 '적절한' 육아를 행하면서도 아이에게나 주변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양육자 본인이 우선 '즐거워야' 한다니, 대체 그 경지는 어디쯤일까. 

무관심 속에 컸고 때로는 원치 않던 짐이었던 자식들은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이 말했듯 "다른 목표들이 임의적이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현세의 희망조차 덧없어진 이곳", 또 너무나 불안정하며 계산적인 세상에서, 아이는 단단한 발판이며 그 자체로 삶의 의미이며, 내면의 성장을 추동하는 기회이자 기쁨이다. 경제적으로는 쓸 데가 없는 자식들은 이제 어마어마한 "심리적 효용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우린 또 다른 대가를 치른다.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아이를 돌보는 물리적 일이 다소 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가전제품, 가공음식, 종이기저귀).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로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예기치 않게 생겨나고 있다... 요즘 가족은 역사상 유례없이 육아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p230

내 아이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압력, 아이의 결함을 교정할 수 있다는 확신, 숱하게 쏟아지는 각종 지식 습득. 바로 '아이의 미래가 부모에게 달렸다'는 '절대 진리'로의 수렴.

온갖 판관들이 사방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가장 소중한 존재에 대한 이러한 요구를 과연 얼마나 거절할 수 있을까. 현대의 육아가 고달픈 첫 번째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정상적인 혼란>(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울리히 벡), <부모로 산다는 것>(제니퍼시니어), <아동의 탄생>(필립아리에스)을 참고했습니다. 이 글은 브런치와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육아가힘든이유, #자식교육,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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