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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의 제9차 총회 이후 청년대중운동을 모색하는 민청련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지부 건설 사업이었다.

기층 청년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일하는 지역 현장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었다. 민청련이 주목한 지역은 서울에서 공장지대라고 할 수 있는 구로, 영등포 공단과 성수 공단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특성상 서울 중심부의 사무전문직 노동청년도 조직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지역 청년 조직사업을 위해 의장단 밑에 지역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안에 남서울(구로, 영등포), 동서울(성수), 북서울(사무전문직) 3개 지부를 두고 조직사업에 착수했다. 각 지부 조직책으로 남서울에는 남근우, 동서울에는 김성환, 북서울에는 김재승을 임명했다.

성수공단에 터잡은 동서울민청련 (동민청)

1897년 가을, 성수교회에서 열린 동민청 창립식.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이 축하인사말을 하고 있다.
 1897년 가을, 성수교회에서 열린 동민청 창립식.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이 축하인사말을 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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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이 조직책으로 임명된 동민청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김성환은 6.29 이전 탄압시기에 사업부장으로 민청련의 살림을 꾸리는데 남다른 수완을 보였었다. 그리고 6.29 이후 총준위에도 참여하여 민청련의 변신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논의과정에서 청년대중운동을 앞장서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지부조직사업이 실천 과제로 제시되자 자원하여 동민청 조직책을 맡았다.

동민청을 지원한 건 당시 김성환이 성수공단에서 가까운 하남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울 쪽에 연고가 있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민청을 자원한 10여 명의 민청련 회원들이 동부지역 조직사업에 참여했다. 김성환 위원장과 김병태 사무국장을 비롯해 윤영헌, 변종만, 홍승창, 이금봉, 연희원, 한영수, 최정호 등이었다.

내부 살림은 김병태 사무국장이 총괄하고 한영수 회원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영수는 동서울 지역 거주자는 아니었지만, 북민청에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조직의 결정으로 동민청으로 옮겨야 했으나 활동은 열성적으로 했다.

김성환과 동민청 회원들은 9차 총회가 끝나자마자 9월 초에 성수동에 사무실을 얻고 바로 활동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화양리 동부세무서 맞은 편에 있는 허름한 2층 건물의 2층에 얻었다.

김성환 동민청 위원장(왼쪽)과 김병태 동민청 사무국장(오른쪽)
 김성환 동민청 위원장(왼쪽)과 김병태 동민청 사무국장(오른쪽)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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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지역상황을 파악해 나가면서 기존에 활동해 오고 있는 지역단체들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협조관계를 맺어나갔다.

성수지역에는 동부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모이고 있었고, 성수교회도 지역운동의 중요한 모임공간이 되고 있었다. 또 당시 국민운동본부에서도 활발하게 지역조직 건설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본부 성동구지부가 이 지역에서 막 조직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건대, 세종대 등 지역에 있는 대학의 총학생회도 연대대상이었다.

이 지역에 신입으로 활동을 시작한 민청련에 대해 기존 지역 활동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서울 시내 사무실에서 놀던 당신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하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때마침 동민청 회원들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9월 초에 조흥운수라는 성수지역 택시회사의 운수노동자 이석구씨가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동민청은 즉시 이 지역 운동단체들과 지역 총학생회들로 대책위를 꾸려서 회사를 상대로 한 농성에 돌입했다. 김성환 위원장 이하 민청련 회원들은 이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부에 연락하여 언론 홍보에도 노력하고 자체적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지역주민에 대한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는 사이에 기존 지역단체들과 신뢰도 차츰 쌓여갔고, 지역 청년들 사이에 민청련 이름을 알려 나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아남전자 쟁의에 대한 지원투쟁, 한양대 병원조조 지원투쟁 등 동부민청련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원 수도 꾸준히 늘어서 이길수, 구광숙 등이 새로 가입해 대략 20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성수동 소재 아남산업 쟁의 지원투쟁에 나선 동민청 회원들. 김성환 위원장을 비롯해 윤영헌, 원혜미, 이금봉, 한영수, 이중원, 조예진의 얼굴이 보이고, 본부에서 지원 나온 사무국의 박순섭, 신기동, 여성부의 이정심 등도 보인다. 타 지부인 북민청에서도 남정현 총무가 참여했다.
 성수동 소재 아남산업 쟁의 지원투쟁에 나선 동민청 회원들. 김성환 위원장을 비롯해 윤영헌, 원혜미, 이금봉, 한영수, 이중원, 조예진의 얼굴이 보이고, 본부에서 지원 나온 사무국의 박순섭, 신기동, 여성부의 이정심 등도 보인다. 타 지부인 북민청에서도 남정현 총무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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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민청련(남민청)

남민청은 수도권에서 가장 큰 공단 중의 하나인 구로공단이 있는 지역이어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지부였다. 1960년대 산업화 초기부터 영등포, 구로 지역은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공장지대를 이루고 있었고,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밀집해서 사는 지역이었다.

1970년대부터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터, YH상사 등 선구적으로 노동조합을 일궈온 노동운동가들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고, 그들이 1984년 방용석 원풍노조 전 지부장 방용석을 중심으로 모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신길동에 사무실을 내고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남민청 사무실 현판식. 앞에 왼쪽부터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문익환 민통련 의장, 장영달 민청련 전부의장. 뒤에 왼쪽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오른쪽 최경환 남민청 회원
 남민청 사무실 현판식. 앞에 왼쪽부터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문익환 민통련 의장, 장영달 민청련 전부의장. 뒤에 왼쪽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오른쪽 최경환 남민청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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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지역에는 노동운동을 꿈꾸며 노동현장에 조직적으로 투신해 있는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목동 지역은 청계천 판자촌 철거 이후에 서울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거대한 빈민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 목동 지역 재개발문제로 빈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민청련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년대중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새롭게 어떤 활동을 펼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민청련 내에서도 이 지역 조직사업을 하려고 하는 지원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남민청 위원장에는 두 사람이 지원했다. 한 사람은 본부 선전부에서 일했던 서울대 출신 윤형기였고, 또 한 사람은 민청련 상임위에서 빈민분과장을 오래 해왔던 숭실대 출신 남근우였다. 집행부가 조정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경선을 했다. 치열한 경합 끝에 투표한 결과 윤형기가 2표 차이로 당선 됐다. 그러나 경선이 끝난 뒤 윤형기가 양보해 남근우가 위원장으로 확정됐다.

남근우는 자신을 지지한 양경숙, 이상강 등 숭실대 계반원들과 빈민분과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팀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지역활동을 시작했다. 사무실도 마련했다. 영등포 버드나무길에 있던 명화극장 맞은편 진흥빌딩 3층에 있었다. 탄압 시기에 이름 없는 비밀 사무실을 전전하다가 이제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공개사무실을 열게 되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남민청 결성대회는 영등포성문밖교회에서 열렸다. 김희택 의장 등 민청련 간부들과 문익환 민통련 의장, 장영달 등 100여 명의 축하객들이 모여 발 디딜 틈 없이 교회를 가득 메운 가운데 결성식이 거행됐다.

김희택 의장이 의장단을 대표해 인사를 하고, 남근우 위원장이 결성 경과보고와 임원소개를 했다. 김복연이 사무국장에 임명됐다. 참석 인사들의 축사와 격려사가 이어졌다. 문익환 목사가 격려사와 기념 시국강연을 했다. 마지막으로 '청년대중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며'라는 제목의 결성선언문을 낭독했다. 결성대회를 마치고 사무실 입주식과 흥겨운 뒷풀이가 이어졌다.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개최한 남민청 결성식. 앉아 있는 사람 왼쪽부터 박우섭 민청련 부의장,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 사회를 보는 사람은 최경환 남민청 회원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개최한 남민청 결성식. 앉아 있는 사람 왼쪽부터 박우섭 민청련 부의장,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 사회를 보는 사람은 최경환 남민청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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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대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남근우 위원장은 김복연 사무국장과 함께 사무실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남 위원장의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성이 좋아 사무실에는 항상 열 명 내지 스무 명의 청년들로 북적였다. 마침 서울 국본 영등포 구로지부 책임을 민청련 출신 김희상 씨가 맡고 있어서 서로 의논하고 협조하면서 활동을 진행해갔다.

회원 수도 꾸준히 늘어 한 때에는 100여 명을 헤아리기도 했다. 공개 대중운동단체를 표방한 만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최대한 개방했다. 영등포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변태희도 입회해서 이후 민청련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성회원이 됐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집회 때면 민청련 두꺼비 깃발을 들고 나서는 민청련맨으로 살고 있다.

북서울민청련(북민청)

북민청은 발동이 다소 늦게 걸렸다. 애초 북민청은 민청련 회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중간층 사무전문직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사실상 기존의 민청련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무실도 중구 쌍림동에 있던 민청련 본부 사무실을 함께 사용했다.
북민청이 조직이 늦어진 것은 조직책으로서 적합한 새 위원장 후보가 선뜻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장단에서는 김재승을 점찍고 있었지만 본인이 고사했다. 오랫동안 집안을 돌보지 않고 줄기차게 투쟁 일선에 서왔던 김재승은 얼마간 2선으로 물러나 있기를 원했다. 

왼쪽부터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남정현 북민청 총무, 김복연 남민청 총무,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왼쪽부터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남정현 북민청 총무, 김복연 남민청 총무,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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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가 코 앞에 다가오자 장준영 부의장과 유기홍 선전국장이 김재승을 설득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김재승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총회 전날 장준영과 유기홍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김재승이 백기를 들었다. 대의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김재승은 청년대중운동에 있어서 사무전문직 청년들의 조직이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할 바엔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김재승은 총회가 끝나자 바로 선전국에서 함께 일하던 이외숙, 이덕희 등과 함께 연구전문직 그룹과 사무전문직 그룹을 조직해나가기 시작했다.

범양화재노조, 현대건설노조, 동의발전노조 등에 대해서 신규노조건설을 지원하거나 노동쟁의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또 민청련 회원들이 많이 근무하던 곳이 출판사였는데, 그동안 불모지였던 출판사 노조를 만드는 일도 거들었다. 또 당시 소장 한국사 연구자들로 이루어진 망원연구소가 있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연구원노조 조직에도 관여했다. 

사무국장은 남정현이 맡았다. 회원들은 기존 민청련 회원들이 주축이었으나 나중에 훨씬 아래 학번인 83, 84학번 들이 대거 들어왔다. 김택수, 정동회, 설문원, 김응교 등이 이 무렵 들어왔다.

결성대회는 10월 20일 7시 종로 3가 종로성당에서 열렸다. 이날 결성대회에서 김병곤 부의장이 '현 단계 청년운동의 방향'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당시 대통령선거 열기가 치열해지고 있었고, 야권에서는 양김단일화가 난항을 겪으면서 민족민주운동 진영도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김병곤이 우렁우렁한 힘찬 목소리로 민주진영의 단결과 새로 발족하는 북민청 회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종로성당에서 개최한 북민청 결성식. 강연하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종로성당에서 개최한 북민청 결성식. 강연하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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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청련, #동민청, #남민청, #북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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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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