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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TV <라디오 로맨스> 포스터
 KBS2TV <라디오 로맨스> 포스터
ⓒ 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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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BS의 <라디오 로맨스>가 막을 내렸다. 대본에 특화됐던 톱스타가 라디오 DJ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라는데, 얘기는 종종 들었지만 한 편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드라마는 드라마다. 막내 작가가 톱스타 DJ와 '썸'을 타고, 멋진 PD한테 고백받는... 장소만 바뀌었지 어디서 본 듯한 러브 라인은 새롭지도, 그렇다고 재밌지도 않다. 여기에 의미를 두는 건 더더욱 무리다.

고등학생 때부터 라디오 작가를 꿈꿨다. 선생님 몰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부하는 척 심야 라디오를 들었다. 혼자 키득거리기도 하고, 같은 방송을 듣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까딱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참 예쁜 추억이다. 낭만 있는 여고생들이라고 나름 보기 좋게 포장도 해 본다. 그래서인지 자습시간은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성적이 점점 떨어졌던 건, 안 비밀!

그렇게 라디오가 좋아 줄곧 라디오 작가를 꿈꿨던 여고생은 자라서 정말 라디오 작가가 됐다. 적성에 맞지 않는 신문사 수습기자를 거쳐 운 좋게도 내가 꿈꾸던, 내가 바라던 장소에 있게 됐다.

ON AIR에 불이 들어오는 라디오 스튜디오는 두근두근 심장을 뛰게 했다. 물론, 연봉은 더 깎였고(라디오 작가는 '페이'를 받는다. 한 마디로 '건바이건', 저렴한 표현이라 죄송합니다) 잡무가 더 많을 수 있다는 여러 조언들을 뒤로 하고 나는 자리를 옮겼다.

꿈을 쫓아 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서였고, 지금도 그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을 택하다니! 그것도 프리랜서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것이 나의 최선이었고, 여전히 베스트라 생각한다.

나의 꿈을 흔드는 현실

그런데 10년 차쯤 되니,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여전히 부족한 실력이지만 글 쓰는 일이 제일 좋고, 좋은 음악을 함께 듣는 것이 또 좋다. 내가 위안을 받았던 것처럼 라디오를 통해 누군가는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물가 상승률 따윈 전혀 반영되지 않는 찔끔 오르는 페이와 불투명한 미래가 자꾸만 꿈을 좀먹는다.

어쩌면 이제야 현실에 눈을 뜨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도 걸렸지. 세상은 라디오부스처럼 따뜻하진 않다.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명감이라면 사명감인 작가에게 실은 영향을 미칠만한 큰 힘이 없다. 결정권이 없다는 것, 책임을 지진 않지만 책임은 있다는 것, 권한은 없다는 것. 이게 냉정한 현실이다.

어느 방송 작가의 '갑질 고발', '비상식적인 행태에 대한 부조리함 고발'이 남 얘기가 아니다. 선배 혹은 후배의 일일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자리'를 걸고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의 자리를 더욱 좁게 만든다.

그나마 서울 방송사는 사정이 좀 나은 편. 지역 방송사는 처우나 환경이 더욱 열악하다. 대우를 바라는 게 아니고, 우대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경력이 최소 10년 이상 차이 나는 데도 불구하고 서울의 막내작가들이 받는 페이보다 지역사의 메인 작가가 받는 페이가 더 적다는 건 단적인 예일 뿐. 서울은 보통 한 팀에 막내 작가와 서브 작가, 메인 작가가 있는 반면, 지역사는 작가 한 명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작가가 아니라 '잡가'라 불러야 할 지경. 가끔 라디오 오프닝 원고를 쓰다 말고, 상품 발송을 위해 봉투에 풀을 부치고 있는 나를 보면 뭐하나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지만,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그렇다. '그런 것도 해? 글만 쓰는 거 아니었어?'

과장해 얘기하자면 정말 글 쓰는 일 빼고 다 한다. 자료조사, 구성, 섭외, 글쓰기. 가끔은 기획안도 작가가 쓰고, 출연자 관련 영수증 받기도 작가의 몫이 되곤 한다. 어디까지가 작가의 일이고 또 어디까지가 PD의 일이고 FD의 일인지 이제는 구분조차 모호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방송국에 떠도는 우스갯소리 중에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이란 질문이 있다. 글쎄, 어떻게 하면 될까. 코끼리 만한 큰 냉장고를 만들면 될까? 잔인하게 욱여넣어야 하나? 답은 '작가한테 맡기면 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저, 늘 해왔던 대로 마음을 단단히 다 잡을 뿐이다.
 그저, 늘 해왔던 대로 마음을 단단히 다 잡을 뿐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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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개편이나 제작진 교체 등의 이유로 일터에 나가지 못한 채 대기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는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못 견디겠으면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프리랜서란 원래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 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당장 선택지가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게 서글프다. 어쩌면 단 한 가지 밖에 안 되는지도 모르겠다. 잠잠히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일단 기다리는 거.

소리소문없이,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없이 프로그램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언반구 언질조차 듣지 못한다는 게, 당사자가 모르는 당사자의 일이 몇 마디 얘기로 결정된다는 게... 통보 아닌 통보를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씁쓸하다. 이런 생리에 적응 할 법도 한데 매번 상처받는 것도 신기하다. 적응이 느린 나를 탓해야 하는 걸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은 여전히 따라가지 못한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방송국 안에는 분명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다만 몇몇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괴로운 건데, 한 가족이었다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는 일이 가장 견디기가 힘들다. 일도 일이지만, 결국은 '사람'을 보고 하는 일들이 많은 법이니까. 결국엔 그런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곁에 둔 나를 탓하게 된다.

내 안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일일이 쓰지 못하는 스스로가 작게만 느껴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스로 상한과 하한의 '수위'를 정해 놓고 글을 써야 하는 게, 온라인상에서도 '자리'를 걸고 얘기해야만 하는 게 서글프다.

점점 목소리를 잃어가는 기분이다. 시스템도 싫고 몇몇이 또 싫지만 라디오가 좋은 게 나의 가장 큰 약점이다.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 꿈꿔왔던 일이라, 쉽게 꿈이 접히지 않는다. 여전히 좋은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게, 나를 의미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게 중요하고 또 그것만이 중요하다.

어릴 적 내 꿈이 '을'이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남들이 뜯어말릴 때,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걸까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그저, 늘 해왔던 대로 마음을 단단히 다 잡을 뿐이다. 일상의 작은 '바람'이 '소원'이 되는 요즘이다.


태그:#라디오 작가, #방송작가, #라디오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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