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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을 하고 온다던 남편을 기다리던 날이었다. 회식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거야 이해 못할 바가 아니지만, 다 끝나고 이제 집으로 출발했다던 남편이 감감무소식인 것엔 부아가 치밀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이거 원.

화를 다스리던 것은 잠시, 몹쓸 상상이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왜 올 시간이 지났는데 도착하지 않을까, 오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전화를 못 받을 이유는 뭘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출발했다는 시간을 감안하면 도착하고도 두 시간은 족히 지났을 시간,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 두 시간. 나는 상상만으로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

덕분일까. 한 손에 왕만두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쭈뼛쭈뼛 내 눈치를 살피며 귀가한 남편이 밉지 않았다. 밉기는커녕,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퍽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애써 잠재우려고 했던 나쁜 상상이, 그날만큼은 나를 구원한 듯하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책표지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책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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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바이오크의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은, 때로는 삶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만든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40년 넘게 호스피스 활동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책은 그가 실제 의료 현장이나 인터뷰를 통해 직접 보고 경험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단언한다. 생사를 건 수술이나 치료를 앞둔 사람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노라 대답한다고.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면 우리는 너와 내가 맺은 관계야말로 가장 소중한 자산임을 깨닫게 된다." (p5)


저자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다고 한다. 삐걱거리는 관계였어도, 퍽 정다운 사이였다 해도,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가슴 아픈 후회로 남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이고도 당연하지만, 잘 하지 않게 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해." "고마워." "용서할게." "용서해줘."


저자는 이 네 마디 말을 일상 속에서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면, 보다 새롭고 생동감 넘치는 관계를 일구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둘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네 마디가 우리의 관계와 삶을 한층 풍요롭게 살찌운다. (중략) 그런데 이 네 마디는 인생의 막바지에서만 아니라 '생의 모든 순간'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네 마디에는 내가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서 배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안목과 지혜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p18)


사랑과 감사는 당연하다고 해도, 모든 죄를 마치 없었던 일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용서와 면죄가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없던 일로 덮는 것도, 죄의 심각성을 희석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란 과거는 과거대로 인정하되 현실을 포용하고 미래를 맞이하는 행위다. 용서하지 않고 증오, 분노, 원한을 품고 상대방을 비난하면 우리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해묵은 상처는 우리를 과거에 옭아매는 사슬이 되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용서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는 해방감을 맛본다." (p52)


운 나쁘게도, 의도적으로 계속 상처를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확실한 답을 모른다"(p78)고 하면서도, 다음의 조언을 건넨다.

"하나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이다 보니 못되게 굴 때가 있고 개중에는 남들보다 그 정도가 심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치사하고 야박하고 탐욕스럽게 굴 때는 사실 자기 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못 이겨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79)


상처 주는 이를 이해하라니,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말이 쉽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심이 몰려올 때쯤 다음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용서의 '감정'이 있어야만 용서를 '베풀'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용서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용서는 수년간 복리로 쌓인 마음의 고통을 단번에 청산해버리기 위해 지불하는 일회성 비용이다." (p83)


저자는 용서의 수혜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쩌냐고 물을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의지만 확고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p90)이라고.

"설령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정말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그 선의의 행동으로 최소한 자기 자신은 그 관계에서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을 알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고 스스로가 대견스러워진다. 제 아무리 독약 같은 관계라고 해도 우리는 용서를 통해 그 독을 제거할 수 있다." (p90)


저자는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것이 당연하다고, 그러니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자긍심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p102)


책의 말미, 저자 역시 이 소중한 네 마디를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점차 그것이 삶 속에 배어들도록 훈련했고, 그러자 자신의 세상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그 역시 지금도 노력 중이란다.

감사와 사랑, 용서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 어린아이도 알 것 같은 이것인데, 실천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니 반복학습은 좋은 선택이다. 진실과 진심이 담긴 이야기엔 울림이 있어, 자연스레 내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니, 출발했다 하고 두 시간을 더 놀다 온 남편은 혼쭐을 낼 일이지만, 소중한 네 마디를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아야겠다.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김고명 옮김, 위즈덤하우스(2018)


태그:#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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