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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신혼 첫 집에는 꽤 널찍한 마당이 있었다. 볕 좋은 날엔 마당에 빨래를 널어 말렸다. 햇볕을 직접 쐬어 보송해진 빨래들이 참 좋아서, 집 안팎으로 빨랫감을 들고 왕복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휴일엔 돗자리를 깔고 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보기도 했고, 태닝을 하기도 했다. 이따금 야외에서 고기를 굽기도 했으니, 캠핑장이 따로 필요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퍽 여유롭고 낭만적이다. 그 집은, 하루 중 절반 가량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전구 하나 켤 수 없는 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했으니, 마당에서 노는 덴 이유가 있었다. 전기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이어서, 정전이 되면 물도 쓸 수 없었다. 말인즉슨, 변기 물도 내릴 수 없단 얘기. 머리에 샴푸를 하다 말고 전기와 수도가 뚝 끊겼을 땐, 비눗물 때문인지 서러움 때문인지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 집을 떠난 지 몇 해가 지났다. 다행히도, 그 집은 추억이 되었다. 이제 우리 부부는 그 때 그 집을 이야기하며 실컷 웃곤 한다.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고, 많이 싸운 만큼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지 배웠던 곳이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상처만 남겼다면 시간이 지났다 해도 악몽일 테다. 그 집은, 추억이다. 우리는 그 집에서, 우리만의 놀이를 찾기 시작했다.

<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 책표지
 <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 책표지
ⓒ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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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축가 김진애의 <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를 보며 내 추억을 한껏 소환했다. 부제는 '김진애의 공간 감수성 키우기 프로젝트'. 저자는 '집 놀이'야말로 24시간 365일 할 수 있는 일상의 놀이이기 때문에 최고의 놀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놀잇거리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집이라는 예측 가능성 때문에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문을 열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 손을 뻗으면 잡히는 그 무엇, 고개를 돌리면 나를 바라봐 줄 눈길, 힘을 쓰면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 그 무엇을 기대하게 하는 움직임, 색깔, 냄새, 소리 등 일상의 예측 가능함은 깊은 안정감을 준다. 뿌리 깊은 안정감은 역동적인 불안감을 견디게 해주는 강력한 보루가 된다." (pp6-7)


저자의 말마따나 집 놀이야말로 여자, 남자,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다. 고로, 어떻게 하면 집 놀이의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살릴 수 있는가가 이 책의 주제다. 그녀가 꼽는 집 놀이의 필수조건은 단 두 가지다. 다른 모든 것이 없어도 이 두 가지를 가졌다면 집 놀이를 할 준비 완료! 혹시 부족하다 해도 기죽을 것 없다.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하나는 '놀이 친구' 또 하나는 '놀이하고픈 마음'. 같이 사는 사람을 놀이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인생 최고의 상황이다. '놀이하고픈 마음'이 샘물처럼 솟구친다면 그야말로 당신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p294)


책은 크게 보아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싸우며 정드는 집, 2장 아이가 쑥쑥 자라는 집, 3장 작은 집도 크게 사는 집, 4장 '집같이' 사는 집. 각각의 주제에 맞게, 집에 관한 저자의 철학과 조언들이 아낌없이 담겨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저자는 "여자 남자가 같이 하는 건, 모두 놀이"(p31)라고 말한다. 이만큼 집 놀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예로, 저자는 남편과 배추김치를 담그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그들 부부에게도 김장이 놀이로 정착하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녀에게도 쉽지만은 않았다고 하니 만만하게 볼 일도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못할 것도 없다. 그 어떤 것이든 놀이가 될 수 있다! 상상은 무한하다.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 수 있는 피스메이커를 만들라는 조언에는 귀가 솔깃하다. 무선청소기처럼 사소한 아이템도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 TV 따로 보기처럼 마찰을 피하는 방법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뿌듯함을 줄 수 있는 물건을 추천한다.

또한, 물건을 찾느라 싸울 것 없이, 낯선 사람들끼리 일해야 하는 작업장처럼 집에서도 분류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집마저 일터처럼 분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니, 한숨부터 내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들어보면 어떨까.

"집을 작업장처럼 업무적으로 대하는 게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그런데 집은 그야말로 온갖 것들의 작업장이나 다름이 없다. 식당이자 주방이고, 공장이자 세탁소이고, 사무소이자 학교이고, 호텔이자 기숙사다." (p61)


저자는 버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으로, "50퍼센트-70퍼센트-90퍼센트 원칙"을 권하기도 한다.

"방바닥은 50퍼센트가 보일 것, 선반의 70퍼센트만 채울 것, 수납장의 90퍼센트만 채울 것. 이 이상이 되면 버릴 때가 되었다. 들여놓으려면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물건들이 어느덧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p179)


저자는 '집 놀이'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은 바 있다.

"첫째, 스스로 한다. 둘째, 같이 한다. 셋째, 자기 식으로 한다." (p8)


즉,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이 책을 이정표 삼아,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다. 좁아도, 지저분해도, 그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우리는 우리만의 집 놀이를 즐길 자격과 의무가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다.

"중요한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이 집에서'라는 것이다. 살맛나야 하는 곳은 바로 지금 사는 이 집이다. 집이 되어야 하는 집은 바로 지금 사는 이 집이다. 행복감을 자주 느끼며 살아야 하는 곳은 지금 사는 바로 이 집이다." (p12)


내게 그랬듯이, 이 책이 독자들로 하여금 추억에 한껏 젖어들게 만들 것을 확신한다. 집에 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든다. 책은 추억을 소환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싶게 만든다. 우리의 집 놀이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상상력을 발휘해 볼 일이다.

"집 놀이는 행복감을 높여준다. 행복이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빈도의 문제다.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얼마나 자주 행복감을 느끼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좌우되는 것이다." (p7)


집 놀이 - 그 여자, 그 남자의

김진애 지음, 반비(2018)


태그:#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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