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승객 여러분 제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올해는 제주 4.3사건 70주년의 해입니다."

지난 21일 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찰나였지만, 나는 두 번 놀랐다. 쏜살같은 세월에 한 번. 그리고 70주년이나 됐는데 4.3사건에 관심조차 갖지 않아 온 나의 무관심에 또 한 번.

다음 날인 22일 아침 한라산에는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이날 나는 4.3평화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70년 전 4.3의 모습을 다섯 개의 작품과 이름을 적을 수 없는 비석을 통해 보았다.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1 작품명: 한라산의 평화
작가: 김창겸

작품설명: 오름의 호수를 상징하는 물을 보여준다. 물에 투영된 하늘과 구름은 오름의 평화로움을 상징한다. 평화롭고 고요하지만 신기루 같은 허상을 보는 것 같다.

하얀 구름만 두둥실 떠가는 적막한 연못. 그 위로 갑자기 검은 사람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연못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첨벙'. 제법 큰 소리가 연못 곳곳으로 울려 퍼진다. 몇 초 후 그는 또다시 돌을 던진다. 그러기를 두세 번쯤 반복했을까, 그림자는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연못도 애초에 아무 일 없었던 듯 고요해졌다.

4.3 평화기념관 안에 있는 전시품 중 하나다. '평화'를 이야기한 작품이지만, 나는 그것이 꼭 '4.3사건과 나'를 표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다 4월이 다가오면, 언론을 통해 4.3사건을 접한다. 잠깐 경각심을 갖는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구체적인 전모는 찾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4.3사건은 여전히 '그림자'인 채로 나를 떠나간다. 그때 처음 그림자가 아닌, '진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2 작품명: 미명(微明, A dim light)
작가: 정용성

작품설명: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함에 따라 해방은 갑자기 찾아왔다. 사람들은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고 또 부르며 이날의 감격을 누렸다. 밝지 않은 빛 속에서 서툰 솜씨로 태극기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화면 속 가족의 감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시관의 시계는 4.3사건의 발단이었던 광복절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일왕인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하자 전 국민이 만세를 외치던 그 시점 말이다. 전시관은 두 팔을 높게 뻗으며 기뻐하는 국민의 사진들로 가득했다.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한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한쪽 벽면 전체에 펼쳐진 그림 때문이다.

세 사람이 모여 앉아 태극기를 그리는 흑백 그림이었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태극기를 그리고 있는 가족'이란다. 그런데 이 그림, 활기찼던 이전 전시관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이들에겐 표정이 없었다. 흰 얼굴과 굳은 입꼬리는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일반적인 국민에게 광복절이란 '끝'을 의미했지만, 제주도민에게 '시작'을 의미했기 때문은 아닐까. 4.3이라는 참혹한 살육의 시작 말이다.

실제로도 광복은 끝이 아니었다. 광복 후 3년간, 우리나라의 통치권은 미군이 갖고 있었다. 물론 국권을 되찾으려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여운형이 대표적이다. 그는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조직은 곧 명칭을 인민위원회로 바꾸고 전국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지방 통치 기구의 모습으로, 지방 주민들의 정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통치권을 쥐고자 했던 미군정에게 이들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유독 결속력이 강했다고 한다. 큰 틀에서는 미군정이 지배하는 듯 보였지만, 인민위원회가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미군정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던 E. 그랜트 미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런 말도 남겼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3 작품명: 레드 아일랜드 (Red Island)
작가: 문경원

작품설명: 1947년 미군정의 조장된 시각에 의해 '레드아일랜드(붉은 섬)'로 잘못 규정된 제주도. 이합집산하는 사람들의 동적 경로를 쫓아 움직이는 미군정의 잘못된 시각은 랜덤 플레이(무순 배열의 프로그래밍)로 움직이는 사각의 창을 통해 사람들을 붉은 실루엣으로 보여준다.

총을 겨눌 때 보일 만한 붉은 사각 창이 화면 안에서 바삐 움직인다. 그 창은 화면 위,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뒤를 바쁘게 쫓아다닌다. 따로 움직이던 사람들의 동선이 가끔 일치해 모이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사각 창은 사람들 위에 멈춰, '쾅'하는 소리를 낸다.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라는 붉은빛 낙인이 나타나는 것을 끝으로 작품은 끝난다.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은, 미군정의 왜곡된 인식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이란다. 그래서였을까. '쾅' 소리는 다른 어떤 표현보다 자극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산스러운 사각 창에 더 눈길이 갔다. 평온하게 화면 위를 걷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미군의 시선을 표현한 사각 창은 불완전해 보였다. 제주도민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거짓 낙인을 찍은 미군정. 낙인이 거짓임을 알았기에 그 시선은 더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미군정은 삼일절 기념 대회 이후,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했다. 제주도민이 삼일절 기념 대회를 연 건 항의 차원에서다. 1946년 제주도엔 대 흉년이 들었고 콜레라가 발생해 매일 평균 50명의 환자가 생겼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내렸으며 친일경찰까지 재등용했다.

삼일절 기념 대회 후, 한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치였다. 그러나 기마대는 다친 아이를 두고 떠나려 했고 분노한 군중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미군정이 제주도로 내려보낸 육지 경찰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쐈다. 아기를 업은 여성과 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실수였다면 사과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경찰은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를 띠고 있다며 오히려 제주도를 'Red Island'로 낙인찍었다.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4 작품명: 4.3의 새벽
작가: 주재형

작품설명: 작품의 배경은 시간상 밤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감정의 공간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감정이 억눌린 정적 공간이지만, 이후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공간으로 바뀐다. 시간이 지나면서 봉기의 상황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한 추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변한다.

검은색 돌로 둘러싸인 파란색 배경에 갑자기 빨간 물결이 차오른다. 물결은 눈부신 섬광을 내뿜는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싼 검은 돌들이 움직이며 마찰음을 내기 시작한다. 평화로웠던 언덕이 울렁거리더니 횃불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돌은 다시 움직이며 마찰했고 이내 화난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기 시작한다. 분노의 과정, 딱 이런 모습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몇 번의 사건이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이고, 응분이 되어 터져 나오는 것 말이다.

4.3사건이 벌어진 배경도 마찬가지였다. 삼일절 기념 대회 이후 고작 1년 새 2500명이 검거됐고 3명의 청년이 고문으로 사망했다. 참다못한 제주도민 350명은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고 남한 단독선거반대와 반미 구국 투쟁을 기치로 내세웠다.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가 습격당했고, 14명이 사망했다.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5 작품명: 행방불명(제주 사람들)
작가: 박불똥

작품설명: 철판에 뚫린 구멍들은 행방불명된 3000의 제주도민 수를 뜻한다. 구멍에 꿰어진 철선들은 가해자의 총구를 떠나 피해자의 몸뚱이에 박힌 총알의 궤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연결한다는 의미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구멍이 뚫린 회색 벽. 그리고 그 구멍 속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가느다란 회색 선들.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한 그 작품 앞에 선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들이 죽어서야 겨우, '그 벽'을 뚫고 나올 수 있게 됐구나 싶어서다. 모든 색이 빛을 잃은 무채색의 사후 세계. 그곳에선 '빨갱이'라는 낙인의 벽 또한 뚫을 수 있을 만큼 말랑말랑해져 있었으리라.

1948년 10월 17일. '적성구역' 지정을 시작으로 제주도민을 향한 강력한 토벌이 시작됐다. 당시 송요찬 토벌 사령관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결단이 이를 가능케 했다. 제주도민은 5.10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분단이 아닌, 평화 통일을 염원한 셈이다. 제주도민들은 선거 당일 투표를 거부하며 산으로 올라갔고,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됐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승만 정부가 집권한 후였던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엔 계엄령이 내려졌다. 계엄령이란 국가 위기사태 때 군대가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모두 장악하는 임시 조치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을 불살랐다. 지역을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사살했다.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도 가리지 않았다. 3만여 명이 '빨갱이'의 프레임 속에서 그렇게 죽어 나갔다.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제주 4.3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6 백비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사태, 폭동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 사건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왜 굳이 천장을 뚫어 놓았을까?' 천장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으로 강렬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름 없는 비석, 백비 위에서 빛이 반사돼 공기 중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이러다 백비가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지'. 내심 걱정이 됐다. 그러나 첫 번째 작품, '한라산의 평화'를 보며 왠지 그 천장을 뚫어놓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전시관은 구멍을 통해 희생자들이 하늘에서도 백비를 지켜보고 있음을 표현하려 했던 건 아닐까.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며 말이다. 우물 밖에 있는 4.3사건이, 우물안에 있는 내게 매년 돌을 던져 왔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역사적 사건의 경우 대부분 그 이름은 봉기, 항쟁, 사태, 폭동 등으로 끝난다. 6월 민주항쟁, 임술농민봉기 등이 그 예다. 그런데도 4.3사건은 아직도 '사건'이다. 4.3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는 항쟁이란다.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횡포, 나아가 단독선거로 인한 분단에 반대했으므로. 또 누구는 폭동이란다. 시간이 갈수록 산부대의 규율과 질서는 무너졌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탄압하는 행동도 자처했기 때문이란다.

언제쯤 백비에 이름이 새겨질 수 있을까. 오늘도 백비 위의 천장에선 희고 강렬한 빛이 떨어지고 있을 테다. 백비 위를 튀기며 소리를 내겠지. 탕 – 하고. 그 소리는 4.3사건의 진상이 온전히 규명되기 전까진, 영영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4.3사건의 모습은 내 마음속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다.


태그:#4.3사건, #43사건, #4.3평화공원, #43평화공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