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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87년 열린 공간에서 열린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양심수전원석방촉구대회에서 가두선전을 하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 (아래) 87년 말 대학로에서 열린 정치집회에 민청련 깃발을 들고 참여한 회원들
 민청련은 87년 열린 공간에서 열린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양심수전원석방촉구대회에서 가두선전을 하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 (아래) 87년 말 대학로에서 열린 정치집회에 민청련 깃발을 들고 참여한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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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대투쟁과 민청련의 조직정비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청련 총회가 있던 8월 말까지 7,8월 두 달간은 온 나라가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진통을 겪으면서 요동치던 시기였다.

정치권에서 민정당과 민주당의 개헌협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즈음 남쪽 울산, 마산, 창원 공업지대로부터 노동자대투쟁이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7월 울산의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조선 등 중화학 대공장에서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은 경기 인천 수도권지역으로 번지고 엄청난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돼 생산현장을 투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전국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이 투쟁에 동참했다. 전례 없는 폭발적인 투쟁이었다. 군사독재에 눌려 기본적인 생존권과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이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선 것이다. 이는 6월항쟁으로 쟁취한 절차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실질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대장정의 출발이기도 했다.

민청련이 9차총회에서 기층대중 청년들을 조직하기 위한 지역지부 건설을 결의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9차총회로 조직을 정비한 민청련은 대내외 사업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와 민통련을 통해 6.29 이후 역동하는 정치정세 속에서 민청련의 대외정책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지역지부 건설을 통해 청년대중을 조직하는 사업이 급선무였다.

민청련 의장단은 총회 직후 서울 중구 쌍림동 사무실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김희택 의장의 주재 하에 향후 조직의 운영방향을 논의하고, 의장단 개개인의 역할을 조정했다.

김병곤 부의장은 본인 희망대로 민통련 정책실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본에서 총무국장을 맡아 일하고 있었던 박우섭 부의장은 본부로 돌아와 앞으로 중요해질 정치 사안들에 대처하기로 했다. 아직은 국본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었으므로 박우섭의 자리에 대신 권형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장준영에게는 기존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청련 내부 조직관리를 전담하는 역할을 맡겼다. 김희택 의장은 대내외 사업을 총괄하면서 국본/민통련의 연대사업에 대표로 참가하기로 했다.

(위) 마창공단에서 노동자대투쟁이 진행될 때 민청련 간부 남근우(가운데 줄무늬 옷 입고 서 있는 사람)가 현장 지원에 나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기폭제가 된 8월 28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
 (위) 마창공단에서 노동자대투쟁이 진행될 때 민청련 간부 남근우(가운데 줄무늬 옷 입고 서 있는 사람)가 현장 지원에 나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기폭제가 된 8월 28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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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세와 양김 단일화 문제

8월 말로 국회의 개헌특위 활동이 마무리되고, 9월 초에 12월 대통령선거 일정까지 여야가 합의하자 정국은 완전히 대선국면으로 전환됐다. 6.29 선언이 전두환 정권의 치밀한 계산과 연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나중에 모두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당시에 민주화 진영 내부에서도 그들의 속셈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치밀한 계산 속에서 대선을 통한 정권연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6.29 이후에 집권세력이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다. 6.29선언의 핵심인 직선제 개헌을 노태우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포장함으로써 노태우가 민주화를 가져온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그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노태우는 8월 5일 민정당 총재에 취임하고, 9월에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 정상들을 면담했다.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부터 대통령후보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열린 정치공간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하나로 단결만 한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민주화운동 진영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단결할 것인가?

선거 국면에서 민주 진영의 단결은 김영삼, 김대중 씨의 협력, 곧 양김의 후보단일화 문제로 압축됐다. 후보단일화 대상에 진보 진영의 후보까지 포함할 수 있었겠으나 사실상 진보 진영에는 양김에 필적할 만큼 국민에게 알려진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에서는 멀어졌다.

양김은 6월항쟁 이후 7월 들어서 몇 차례 회동하여 국민에게 단일화를 약속했다. 그리고 1980년 같은 우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개헌협상이 진행되는 7,8월 두 달 동안 두 사람은 내부적으로 단일화 국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단일화 문제에서 민주당 총재인 김영삼이 김대중 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1986년 말 김대중이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한 적이 있었고, 당내 세력분포에 있어서도 김영삼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영삼은 후보단일화 문제를 민주당 내부 문제로 묶어두고 양김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를 가졌고 대중연설에 능한 김대중은 이 문제를 당 밖으로 끌고 나가 국민대중 속에서 여론에 의해 결정짓고자 했다.

김대중은 9월 초, 광주와 목포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50만 이상의 인파가 모여 지지세를 과시했다. 경쟁은 더욱 가열됐고, 두 사람이 약속한 단일화가 위태롭게 되지 않나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후보단일화 문제를 양김 두 사람에게 맡겨 둬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국본이나 민통련 등 재야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양김의 갈등은 대통령 선거 출마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왼쪽) 87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연설을 하는 김영삼. (오른쪽) 9월 개운사에서 민청련 창립4주년 기념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김대중
 양김의 갈등은 대통령 선거 출마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왼쪽) 87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연설을 하는 김영삼. (오른쪽) 9월 개운사에서 민청련 창립4주년 기념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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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과 김대중의 만남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의 새 집행부가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의장단은 회의를 열고 9월 30일 창립 4주년 기념대회에 양김을 초청하기로 했다. 양김 단일화에 앞서 두 사람을 대중 앞에 세워 그들의 경륜과 능력을 검증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대회 장소는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로 정했다. 명진 스님이 주지로 있는 개운사는 아주 큰 절은 아니지만 승가대학이 있는 전통 있는 조계종 본찰 중의 하나였다. 서울시내에 있는 절로서는 마당이 제법 넓어 천 명 정도의 대중 집회를 하기에 충분했다.

양김 참여 교섭은 김병곤과 박우섭, 두 부의장이 맡았다. 김병곤은 부산 출신이어서 김도현  등 김영삼 측근들과 대부분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영삼 쪽 연락을 맡았다. 박우섭은 김대중 쪽과 민청협 시절부터 긴밀하게 연락하고 지내던 터여서 김대중 쪽 참가 교섭을 했다. 민청련 창립 때 참여했던 고대 출신 설훈이 김대중 비서로 있어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김대중 쪽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참석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김영삼 쪽에서는 김대중과 장외에서 연단에 함께 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일정을 이유로 정중하게 불참을 통고해왔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전 날인 29일, 양김 사이의 후보단일화 담판이 있었으나 결렬됐다. 그리고 당일인 30일 오전에는 김영삼이 "민주화를 향한 이제까지의 투쟁을 평화적 정치적으로 완결해보고 싶은 것이 나의 포부"리고 밝히며 사실상의 출마 선언을 했고, 김대중에게는 후보를 양보하는 대신 당 총재를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이 새삼 대중 앞에 김대중과 나란히 서서 후보 경쟁을 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김대중으로서는 대중집회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날 낮 민가협 전국회장단 13명이 김대중을 면담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후보단일화를 꼭 이룩하여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성취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단일화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져만 갔다.

김영삼의 불참으로 후보단일화를 위한 집회라는 정치적 의미는 퇴색하게 됐지만, 민청련은 예정대로 집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9월 30일 저녁 7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4주년 기념강연회'가 약 1천여 명의 청중이 개운사 법당 앞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다. 주제는 "새로운 민주정부,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외부 초청 연사로 김대중 외에 오순부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위원장이 참석했고, 민청련 대표로는 김희택 의장이 연사로 나섰다.

청중은 민청련 회원을 제외하면 김대중 지지자들이 많았다. 강연순서는 오순부, 김희택, 김대중의 순이었다. 오순부 위원장의 노동현장 고발과 김희택 의장의 차분한 연설은 좋은 반응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김대중의 연설이 압권이었다.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 등단한 김대중은 원고도 없이 때로 차분하게, 때로 힘차게, 약 1시간의 연설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걸어온 험난한 길, 광주항쟁의 아픔과 6월항쟁의 승리, 그리고 자신이 집권해야하는 이유와 집권 이후 펼쳐나갈 정책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연설은 청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청중들은 환호했다. 마치 대통령 선거유세를 방불케 하는 연설이었다.

개운사에서 9월 30일에 열린 민청련 창립 4주년 기념강연회 모습. (위) 김희택 의장이 강연대에 올라서 연설하고 있다. (아래) 박우섭 부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개운사에서 9월 30일에 열린 민청련 창립 4주년 기념강연회 모습. (위) 김희택 의장이 강연대에 올라서 연설하고 있다. (아래) 박우섭 부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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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이날 집회는 많은 청중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끝났지만 민청련 집행부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김대중을 위한 집회,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길을 닦아준 집회가 되었다.

이것이 앞으로 닥칠 엄청난 비극의 전조가 되리라는 것을 민청련 지도부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태그:#민청련, #후보단일화, #김영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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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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