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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가 제일 보고 싶냐?"
"당연히..."
"그게 바로 다음에 오를 산이야."

2016년 연초에 본 영화 <히말라야>에서 엄홍길 대장(황정민)과 故 박무택 대원(정우)이 극한의 상황에서 나눈 대화이다.

"해발 7~8천 미터만 올라가면 철학적인 생각이 막 떠오를 거 같죠? 그런데 안 그래요. 오로지 제 자신이 보입니다.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 진정한 나를 볼 수 있지요.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살면서 진정한 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영화 중간 엄홍길 대장이 말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음에 오를 산을 떠올리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를 죄는 고통 속에서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다니.

“지금 누가 제일 보고 싶냐?”
▲ 영화 히말라야 포스터 “지금 누가 제일 보고 싶냐?”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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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체 베이스캠프에서
▲ 열정의 중년이 뭉쳤다! 임자체 베이스캠프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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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 곳에 가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해 5월, 영화 <히말라야>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막연한 꿈이 현실이 되어 히말라야에 발을 들였다. 3월 임자체 원정대 공개모집에 무작정 지원서를 냈다. 찾아온 기회를 잡는 건 준비된 자의 몫이다.

평소 다진 기초체력 덕에 무난히 체력 테스트를 통과했다. 하지만 어센더, 비너, 하강기, 하네스, 확보줄, 코드슬링의 기능을 익히는 건 고사하고, 낯선 산악장비 이름을 외우는 것만도 벅찼다. 잡은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건 처절한 노력뿐이었다. 최종 선발된 김현주 대장을 비롯한 6명의 대원들과 도원결의도 맺었다.

김현주 대장은 철저한 훈련과 안전 확보에 엄격했다. 수시로 대원들의 애로를 살피는 걸 보니 리더의 품격이 느껴졌다. 변재수 대원, 산악인은 다 그런지. 동료를 챙기고 채워주는 모습이 남 달랐다. 그와 말을 섞으면 나도 착한 소년이 된다. 송남석 대원, 바이크의 지존이자 지구력 강한 에너자이저이지만 적당한 건망증이 매력이다. 김민호 대원, 다부진 근육과 강온의 기운이 동시에 풍기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박운범 대원, '궂은 일은 내가 먼저'를 몸소 실천하며 능력으로 평가 받으려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리고 나, 나는 내가 잘 안다. 나는 직장인 모험가, 내게 도전은 맛난 사탕이다.

쿰푸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서
▲ 오르고 또 오르고... 쿰푸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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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와 물소의 교배종... 좁교
 야크와 물소의 교배종... 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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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지에서 만난 허영호 산악인
 롯지에서 만난 허영호 산악인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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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남쪽 7.5km, 남체바자르 북동쪽 25km에 위치한 소박한(?) 봉우리. 원정대의 미션은 쿰푸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 솟아오른 임자체(6189m) 정상에서 태극기를 더 높이 치켜세우는 것이다.

영국 탐험가 에릭 십턴은 딩보체에서 바라본 임자체가 얼음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고 '아일랜드 피크(Island Peak)'로 이름 붙였다. 여정은 에베레스트로 가는 트레킹 루트를 따라 접근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등반이 가능하고 경이로운 히말라야 산군의 풍경과 빙하를 감상할 수 있는 등반코스다. 정상에서 보이는 에베레스트 지역의 파노라마가 일품이라니 출국하기도 전에 벌써 마음은 히말라야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달랐다. 냉온과 흑백, 피아의 경계가 극명히 갈리는 그 곳. 네팔 카트만두에서 루크라로 이동해 9일 동안 고산병을 달고 오르다 5월 28일 낮 12시 20분, 베이스캠프(4970m)에 도착했다. 곧이어 밤 1시 10분, 대원들은 임자체 등정을 위해 어둠을 가르며 정상으로 향했다.

스산한 기운 속에 하이캠프(5600m)를 만났다. 잠시 쉬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조금만 지체해도 앞선 대원들과의 간격이 벌어졌다. 무시무시한 너덜지역에 들어섰다. 여진이 느껴졌다. 두 다리가 휘청거리고 두통이 머리를 조여 왔다. 대원들과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피로에 초조감까지 겹쳤다. 나를 다잡아 줄 주문 한 마디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 땅의 주인에게 길은 내어주자~
▲ 끝없는 행렬 이 땅의 주인에게 길은 내어주자~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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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광이 한눈에...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광이 한눈에...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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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받는다고 절망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그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절망에 몸을 맡기는 건 가장 소심하고 한심한 일이다.' 비겁하지 않게, 소심하고 한심하지 않게 짐승처럼 기어올랐다. 새벽 6시 30분, 베이스캠프를 나선지 5시간을 넘겨 천신만고 끝에 아이젠 포인트(5950m)에 올라섰다.

산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도착한 김현주 대장과 변재수, 송남섭 대원이 정상 공격을 위해 온 몸에 자일을 동여매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갈 모양이다. 울컥거리는 심정은 추슬렀지만 나는 한동안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함께 오른 셰르파 밍마가 내 손을 굳게 잡으며 위로하려 애썼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대원들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대장의 명령에 발길을 돌렸다. 발끝에 온 신경을 쏟으며 위험천만한 하산을 단행했다. 하반신이 연신 후들거렸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딴생각을 했다가는 죽음과 직결될 수 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미련보다 무사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나를 위로했다.

덤덤한 심정은 얼마못가 아쉬움으로 변해 큰 홍역을 치르고서야 평정을 찾았다.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 때는 찾아온다고 하지만 나는 때를 만들어 간다. 맛난 사탕을 늘 입에 물수 없다. 임자체 목전에서 진한 실패를 맛본 후에 성공보다 갚진 인생의 자양분을 얻었다.

임자체를 오르기 위해 진화된 중년의 대원들
▲ 등정 임자체를 오르기 위해 진화된 중년의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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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조금만 더 힘을 내자~
▲ 5,850m 아이젠 포인트 넘어... 으랏차차! 조금만 더 힘을 내자~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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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어쩌면 돈키호테는 허황된 꿈을 쫒는 미친 존재 같지만 그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장차 이룩할 세상을 꿈꾸며 숨을 거둘 때까지 무사 수업을 멈추지 않았다. 귀밑머리의 서리는 주체할 수 없이 내 옥상 전체를 덮어버렸다. 솎아내기엔 이미 한계를 넘어버렸다. 탈모가 아닌 게 다행이다. 뱃살은 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시력도 뚝 떨어졌다. 그래서 다행이다. 지금 20대의 눈을 갖고 있다면 난 더 미칠지도 모를 일이다.

기어코 임자체 정상에 올라 선 대원들
 기어코 임자체 정상에 올라 선 대원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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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휴먼스쿨
▲ 팡보체의 아이들을 위해 건립된 엄홍길 휴먼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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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임자체를 다녀와 다시 일상에 묻힌 나는 인터넷에서 기사 한 토막을 발견했다. 몇 해 전 UN은 인간의 체질과 평균 수명을 감안하여 연령별 기준을 5단계로 나누어 발표했다고 한다. 0세~17세까지 미성년자, 18세~65세까지는 청년, 66세~79세까지 중년, 80세~90세까지 노년 그리고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으로 새롭게 구분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중년이 아니었다. 가진 것을 유지하고 안정을 쫓을 일은 먼 훗날의 일이다. 나는 청년이었다. 실패마저 용서 되는, 나는 50대 청년이다.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히말라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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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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