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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라는 공간에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특별전이 열림으로서 4.3은 대한민국 역사라는 의미가 있다.
▲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4.3특별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라는 공간에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특별전이 열림으로서 4.3은 대한민국 역사라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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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서울 정동의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제3기 '제주문화학교'(교장,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강연에는 소설 <순이 삼촌>을 써서 제주 4.3을 널리 알렸던 현기영 소설가가 강사로 나왔다. 허연 머리카락과 눈썹, 오랜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특별히 수강생들이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옷깃에 달려있는 동백꽃 뱃지였다. 그가 강연 시작과 함께 동백꽃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 눈밭에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상상해 보라. '귀를 짤라와라, 참수해서 목을 가져와라'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죽어간 수많은 제주인들의 피이고 한인 것이다. 추운 겨울 한라산 계곡, 제주 마을 곳곳에 동백이 피지 않는 곳이 없다. 이보다 더 제주4.3을 상징해 주는 꽃이 있겠는가?" 

올해로 70주년 맞는 제주 4.3을 소재로 쓴 '순이 삼촌' 쓰고 나서 당시 보안사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던 이야기, 이로 인한 악몽과 트라우마, 소설의 배경이 된 북촌마을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그 동안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었던 4.3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망각에 대한 저항하는 기억운동'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제주 4.3의 대참사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한국 현대사의 최대 실패요 치욕이다. 반드시 그 역사를 잊지 않도록 교과서에 그 진상을 실어서 국가의 삶을 경계해야 한다"며 힘주어 말횄다.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주제로 3.30~6.10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 4.3, 70주년 기념 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주제로 3.30~6.10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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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 '제주4.3 사건 진상보고서'
▲ 제주 4.3 진상보고서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 '제주4.3 사건 진상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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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이날 강연에 앞서서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3월 30일~6월 10일)을 찾았다고 했다. "외면 당하고, 왜곡되었던 제주 4.3이 드디어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면서 목이 메이고 흥분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당하고, 촛불의 힘, 민중의 힘에 의하여 제주 4.3이 살아나고 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기영 작가는 또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제주는 다른 지역보다 인구 비례 독립 투사들이 제일 많은 고장이다. 일제 때 오사카 일대의 공장지대에는 5만~6만의 노동이주민들이 일본인 노동자들보다 절반 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온갖 힘들고 궂은 일들을 해야 해서 노동 운동이 활발했는데, 그 노동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 중에는 제주인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어렵게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도 많았고, 그들이 독림운동에 참여한 경우들이 많았다. 이미 제주는 일제 때 '제주 해녀 항쟁'은 유명한 항일 투쟁이었다. 이런 전통 위에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들은 독립된 나라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나 그런 기대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제주 해녀항쟁은 일제감점기 때, 해녀들이 캐낸 전복과 감태 등을  제 값을 안 주고 싸게 수매를 하겠다고 하면서부터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구좌 일대의 제주 동부지역 해녀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다. 1931년 12월 20일부터 시작하여 1932년 초까지 약 3개월 간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230여 회의 집회 및 시위를 벌인 항일투쟁이다. 일본인 상인들의 배제 등 명백한 항일투쟁이었다. 일제는 34명의 해녀들을 검거하고 이 운동을 도왔던 남성들도 여러 명 검거하였다.

제주는 해녀항쟁도 유명하지만 조천 등지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고, 의병 활동,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 제주 출신 재일 동포들의 일본에서의 항일운동, 노동 운동 등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햔 형태로 이루어졌다. <제주의 소리> 보도에 의하면 제주출신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인사들이 535명이 이를 정도라고 한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민들은 생활고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의 공장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선진 노동 운동을 경험하고 조직에 참여해 활약하던 이들도 많았다. 김문준·김달준·조몽구·강규찬·현호경·김용해·강창보·송성철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조천 출신 김명식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 와세대 대학으로 유학을 하여 그곳에서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동아일보 주필을 거치기도 하고, 서울과 제주를 오고 가면서 언론과 사회주의 계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유명하다. 

제주 4.3은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29일 '서울에서 제주문화를 본격 탐구하다'라는 주제의 '베주문화학교' 강좌에서 4.3은 '망각에 대한 저항하는 기억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밝힘
▲ 제주4.3 강연하는 현기영 소설가 3월 29일 '서울에서 제주문화를 본격 탐구하다'라는 주제의 '베주문화학교' 강좌에서 4.3은 '망각에 대한 저항하는 기억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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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는 제주 4.3은 이런 제주인들의 이런 해방과 독립에 대한 의지가 타지역보다도 높은 지역적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연을 이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높았다. 미국의 투르맨 대통령을 투르(眞), 맨(人)이라 해석을 하면서 '진인(眞人)'은 정감록에 나오는 메시아 같은 사람으로 기대가 컸다. 그렇지만 해방 이듬해인 46년에는 심하게 보리 흉년이 들고, 콜레라가 돌아 제주에서 400여 명이 사망하는가 하면, 미군정 시기에도 일제 때와 같은 곡물 공출이 이루어 지면서 그런 기대들이 무너졌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을 지원했다. 그런 소식을 듣고 47년 3월 1일 삼일절에 제주시 관덕정 앞, 제주북교 등에 3만 여 명이 모이고, 모슬포라든가 서귀포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단독정부 반대', '공출반대', '친일파 재등용 반대' 등을 외치면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기마 경관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말발굽에 의하여 어린 아이가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지가 시위대들이 항의하려고 경찰서로 몰려가는데 발포를 하여 6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미군정 등이 잘 처리했으면 4.3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음으로써 제주도 전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나게 된다. 학교도 동맹파업에 참가하고, 운수업 등 기업, 공무원, 심지어는 경찰도 일부 파업에 참가하였다.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친다. 2400여 명이 검거 되자, 젊은이들은 집에 있질 못하고 일본으로 밀항을 하거나 여기 저기로 토피하게 된다."

이번 4.3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박경훈' 화가의 작품
▲ '통곡'이란 작품 이번 4.3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박경훈' 화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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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1947년 말에 서북청년단이 제주로 밀려들어와서 식량을 약탈하거나 부녀가를 겁간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 그런데다 47년 말에는 3건의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 사람들은 '이건 아니다. 서서 당할 수만은 없다'라는 분노가 치솟게 된다.   

1948년 4월 3일 200~300명의 무장대가 일제히 봉기를 하여 경찰서 등을 습격하면서 4.3은 본격적으로 격화되게 된다. 무장대라고 해도 이들은 일제가 숨겨놓고 간 총 20여 자루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은 군경을 투입하여 강경 일변도로 토벌이 벌어진다. 그해 8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10월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안에서 5km 밖의 지역 사람은 닥치는대로 사살하도록 하여 피해는 더욱 커졌다. 중산간 마을의 95%가 불에 탔다. 무장대의 총책이었던 김달삼 등은 1948년 6월에 북한에서 열리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다며 제주를 빠져나갔고, 그의 뒤를 이은 이덕구가 1949년 6월에 사살이 되면서 무장대는 궤멸이 된다. 한라산 금족령이 풀린 것은 1954년 9월 21일이다.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 제주4.3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
▲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는 영상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 제주4.3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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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은 역사 속에 묻혀오다가 김대중 정부에서 '제주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고, 진상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제주도도민들에게 공식사과하기도 하였다. 박근혜정부에서도 4.3을 국가 지정 추념일로 정하기도 하였다.

4.3은 제주도민의 1/9 이상이 희생된 사건

교과서에도 제대로 실리고, 대한민국 역사로서 자리잡아야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제대로 실리고, 대한민국 역사로서 자리잡아야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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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는 '순이 삼촌'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갔다.

"4.3에서 가장 널리 알렸진 '북촌마을'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당시 내 나이가 여덟 살인데, 북촌마을에 찾아가서 8살에 죽은 아이의 무덤을 보면서 나를 생각했다. 창창한 미래가 있는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어가야 했나? 무덤 위의 잔디를 쓸면서 울었다.

당시 북촌마을에서 어린 아이, 노인 구분없이 죽임을 당했는데, 400여 명은 마을에서 죽고 나머지 30여 명은 인근에 있는 함덕해수욕장을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순이 삼촌'을 내고 보안사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는 등 너무 힘들어서 한 동안은 글도 안 쓰고 술만 마셨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 소복입은 여인이 나타나서 손을 내밀며 '허구허 날 술만 먹냐?'고 하여 그 때부터 순수문학은 글렀다는 생각을 하고 4.3이나 잘 해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딩시 4.3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약 3만 명이라고 한다. 당시 27만 인구의 1/9에 해당하는 숫자다. 아직도 이 사건을 꺼내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내가 추정하기로는 5만 명 정도는 희생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4.3은 '망각에 대해 저항하는 기억운동'이 되어야

현기영 작가는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씨의 말을 인용해 "제주 4.3은 궁지에 몰린 쥐가 돌아서서 고양이 콧등을 문 격이다"라는 말을 소개했다.

"제주 4.3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이다.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새로운 말을 만들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무지막지(無知莫知)하다',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은 역사가 되어 버렸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에 있었던 유태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의 경구를 소개하면서 강연을 마쳤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대신에 4.3을 대입해 보자. 망각하는 자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그 과거를 다시 반복할 운명이 된다."

4.3의 진실이 무엇인지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면서 강연을 마쳤다.

이날 강연을 들은 김홍국씨는 질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제주 4.3 사건'이라고 이 사건을 4월 3일에 촛점을 맡춘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무고한 제주 양민들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학살했다. 그래놓고 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들이 봉기한 날짜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남로당 무장대의 봉기'로만 성격 규정을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 같다. 무장대도 아니고 어린 아이, 노인들, 무장대 활동을 하지도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엄청나게 많이 죽어갔다. 이제는 '제주 4.3'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성격 규정을 하고 그에 걸맞는 명칭으로 불려야 한다."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70주년 기념 특별전 열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제주 4.3 관련 각종 기록들과 유물, 미술작품 등을 전시하여 제주 4.3에 대하여 알리고 있다.
▲ 4.3특별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제주 4.3 관련 각종 기록들과 유물, 미술작품 등을 전시하여 제주 4.3에 대하여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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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제주 4.3 7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 4.3과 관련되어 있는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안내문들과 영상물, 관련 유물들, 화가와 문인들의 작품, 서적, 학생들의 글이나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제주 4.3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등은 올래 다양한 행사들을 열고 있다. 4월 3일~7일에는 서울 광화문에 분향소를 설치하여 추모제가 있고, 4월 3일~4월 6일에는 전국 분향소에서 추모제가 열리고, '4370 동백꽃 라이딩'이라는 전국 자전거 순례, '제주4.3 평화기행',  각종 공연, 학술제 등 연중 열리는 행사 등도 있다. 자세한 것은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02-786-4370)로 문의하면 안내 받을 수 있다.



태그:#제주 4.3, 70주년, #현기영 소설가, #망각에 대한 저항운동, #4.3도 우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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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초등위원장,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을 거쳐 현재 초록교육연대 공돋대표를 9년째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교사, 어린이, 학부모 초록동아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초록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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