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포스터.

영화 <소공녀>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한 가수 이랑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트로피를 경매에 부쳤기 때문이다. 이랑은 수상소감으로 "1월에 (전체) 수입이 42만 원, 2월에는 96만 원"이라고 말했다. 이후 SNS를 통해 이랑은 "트로피 경매가 기사화되면서 댓글로 '돈 안 되는 음악 해놓고 불평하지 말고 돈 되는 일을 해라', '편의점에서 일하면 되지 않냐'는 반응들을 봤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가 발표한 '전월세 동향·임차비용 상승현황'에 따르면 서울의 평균 월세 부담액은 114만9000원에 달한다. 댓글대로 이랑이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42만 원보다는 더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집값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집을 가지는 건 아예 사치가 된 세상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러한 삶은 어느 누군가의 개인적인 일도 아니고, 어느 한 시절의 단기적인 사례도 아니다. 지난 22일 개봉한 영화 <소공녀>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 와중에 자기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한 청춘의 이야기다.

'집은 없지만 생각과 취향은 있다' 이 말이 주는 깊은 울림

 영화 <소공녀> 스틸 컷. 모든 게 다 변하는 상황에서 집은 포기해도 위스키와 담배는 포기 못하는 미소.

영화 <소공녀> 스틸 컷. 모든 게 다 변하는 상황에서 집은 포기해도 위스키와 담배는 포기 못하는 미소. ⓒ CGV 아트하우스


미소(이솜 분)는 가난한 청년이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과 잠자리를 가지고 싶어도 난방이 안 돼 추우니 봄에 하자고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다. 그런 미소의 특별한 점은 돈이 있으면 위스키와 담배를 꾸준히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위스키와 담배 값이 오르고, 설상가상으로 방세도 5만 원 오른다. 알고 보니 집 주인도 월세를 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월세가 10만 원 오르자, 미소의 방세를 올린 것이었다. 일방적인 착취가 아닌 착취의 순환고리라는 씁쓸함을 준다.

영화는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는 도시를 그린다. 미소는 집을 포기할 결심을 한다. 쉽게 할 수 없는 결정이었겠지만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집을 포기할 수밖에. 아니, 사실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집을 포기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이다. 미소가 얼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집주인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결정은 미소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집 떠난 미소의 방랑기가 펼쳐진다.

미소는 과거에 밴드를 했다. 밴드가 해체되고 멤버들은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데, 집을 떠난 미소가 향한 곳은 과거 밴드 멤버들의 집이다. 친구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중이다. 현실과 타협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닐까. 영화는 굳이 현실과 타협한 친구들과 현실에 맞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미소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바라보진 않는다. 이게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모두 자신이 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살 뿐이다.

 영화 <소공녀> 스틸 컷. 오늘도 떠도는 미소. 하지만 위스키와 담배가 함께한다면야 힘든 하루도 버틸 수 있다.

영화 <소공녀> 스틸 컷. 오늘도 떠도는 미소. 하지만 위스키와 담배가 함께한다면야 힘든 하루도 버틸 수 있다. ⓒ CGV 아트하우스


다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나이 먹고도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한 철없는 성인'을 세상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삶의 무게에 찌든 친구는 미소에게 도리어 위로를 받는가 하면, 먹고 살만 한 친구는 미소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후자의 경우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내는 개인이 얼마나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보여준다.

친구 정미(김재화 분)가 미소의 '철없음'을 비난하자 미소는 자신은 위스키와 담배를 사랑한다며 맞받아치지만, 정미는 '그 사랑 참 염치없다'고 비웃는다. 그 '염치없다'라는 말 한마디는 마치 관객이 미소인 것 마냥 상처를 안겨주는 듯한 감정이 들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을 뿐인데 염치없을 것까지야.

또 다른 친구 록이(최덕문 분)는 무례함의 끝을 달리는 캐릭터다. 자신의 집을 찾은 미소에게 오밤중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결혼을 제안한다. 너나 나나 사는 방식은 똑같지 않느냐며, 그렇게 떠돌지 말고 자기랑 같이 살자고. 이 뜬금없고 무례한 제안에 미소는 '집이 없는 거지 생각과 취향은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깊은 명대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과 취향은 '먹고사니즘'에 봉착해 있는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게 아닌건지, 록이는 미소의 '철없음'을 타박한다.

위에서 인용한 월세 통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그래도 '자기 몸 누일 곳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사람이니만큼 미소는 방을 구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비싼 보증금과 비싼 월세에 혀를 내두른다. 더 싼 곳을 보여달라는 미소의 말에 집주인은 고도가 더 높은 곳으로, 질적으로 덜 좋은 방으로 소개시켜주다가, 기어이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 원이지만 전기가 나오지 않는 방까지 보여주기 이른다. 게다가 그 방은 좁고 냄새 나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가격을 낮출수록 삶의 질도 같이 낮아지는 씁쓸함.

자신을 지켜낸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새삼 영화는 일깨운다. 열악한 경제적 상황 만큼이나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부로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미소의 서식지'를 찾아 오늘도 떠도네

 현실에 타협한 것 역시 선택의 일종이다. 영화 <소공녀>는 선택과 다른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어떤게 옳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현실에 타협한 것 역시 선택의 일종이다. 영화 <소공녀>는 선택과 다른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어떤게 옳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 CGV 아트하우스


이랑의 트로피 경매 퍼포먼스가 떠오른 것은, '철없음'을 함부로 규정하고 이를 타박하는 사회의 희생자라는 점에서 집 없이 떠도는 미소와 비슷해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소의 부모님이 할 법한 말들이다. 그렇지만 미소는 가사도우미라도 하면서 자신의 자존을 지켜가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가려내는 것을 서슴지 않는 사회에서, 감독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굳이 옳고 그름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고자 한다. 그저 선택과 또 다른 선택이 있을 뿐. 영화 속 친구들이 보여주는 무례함과 폭력들은 그들이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이를 존중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영화 속에서 미소는 약을 먹지 않으면 백발이 되는 병을 앓고 있다. 사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 '백발'은 줄거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돈이 있어야 약을 사먹을 수 있다는 정도. 영화의 엔딩에서는 머리카락이 모두 하얘진 미소가 위스키 바를 떠나는 뒷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그녀가 낸 지폐 몇 장에 주목한다.

그렇다. 시간이 지나 위스키 값은 또 올랐다. 미소는 약 먹기를 포기했을까? 아니면 먹었는데도 끝내 막지 못한 걸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세상 모든 것이 변했지만 위스키와 담배가 미소에게 행복을 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공녀 #이솜 #미소의 서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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