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쓰리 빌보드> 포스터

영화 <쓰리 빌보드>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주의!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마을에서 강간 당하고 살해당한 딸 안젤라의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을 도발하기 위해 미주리 주 에빙 외곽의 허름한 세 개의 광고판에 광고를 싣는다.

"강간 당하고 살해 당했는데"
"아직 못 잡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윌러비 소장?"

경찰 소장(우디 해럴슨)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밀드레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건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밀드레드라는 사람에 집중한다. '굳이 그런 광고를 실어야 했냐'고 그녀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윌러비 소장은 마을에서 존경받는 경찰인 데다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기에 밀드레드의 행동은 윌러비를 망신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밀드레드는 마을 사람들의 공격을 받는다. 특히 인종 차별주의자에다가 알콜 중독 경찰관 딕슨(샘 록웰)은 그녀의 주변인들까지 괴롭히고 사건은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딸을 잃은 엄마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적은 누구인가?

밀드레드가 광고를 낸 것은 "싸우자"의 의미가 아니다. 부디 사람들이 자신의 딸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잊지 않고, 경찰들이 범죄자를 잡아들여 그에게 죗값을 치르도록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도 경찰과 밀드레드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 경찰 서장 윌러비는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서 수사에 임하고 있다 말하며 광고를 내려 줄 것을 요구하는데 밀드레드는 그가 말하는 최선을 믿지 않는다.

영화는 경찰의 수사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 좋은 윌러비 소장은 광고판에 자신의 이름이 박혀있다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작은 시골마을 경찰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착잡한 마음으로 경찰서로 복귀한 윌러비는 그제서야 안젤라 사건 파일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렇다면 다른 경찰들은 어떠한가?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딕슨은 안젤라 사건에는 관심도 없고 어떻게 하면 밀드레드가 광고를 내릴 지 궁리하는 데만 급급하다.

본질을 비껴가는 여론

 영화 <쓰리 빌보드>의 한 장면.

영화 <쓰리 빌보드>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자신을 취재하러 온 지방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밀드레드는 "제발 우리 딸을 죽인 범인을 잡아 주세요"라며 눈물 짓지 않는다. 그는 당당하게 거친 언어로 경찰의 무능을 공격하는 데 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감을 일으킨다. 그녀의 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밀드레드의 행동에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나?'라고 반응한다.

사고뭉치 경찰 딕슨마저 윌러비의 말이라고 하면 귀 기울여 들을 만큼 윌러비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거기다 다정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까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암 환자다.

메시지가 타당하다고 해도 메신저의 표현방식에 거부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도를 곡해한다. 이는 비단 영화 속 밀드레드의 경우뿐만이 아닐 것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윌러비의 죽음을 알고 분노한 딕슨, 그의 슬픔은 엉뚱한 대상에게 분노로 폭발한다. 그는 곧장 밀드레드의 광고를 실어준 광고판 관리업자 레드를 찾아가 그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고는 창밖으로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폭력이지만 영화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분노를 딕슨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딘가 살아있을 강간치사범을 두고 피해자 가족과 경찰이 대립한다. 화는 화를 부르고 당사자들은 한 대 맞으면 두 대 갈기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더 큰 폭력을 행사한다. 도대체 이들의 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그리고 그 분노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전 남편 찰리는 밀드레드에게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폭력 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치과의사의 손가락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자신의 차에 음료수 캔을 던진 고등학생의 가랑이를 차버리고, 급기야는 경찰서에 불까지 지르는 밀드레드의 모습. 밀드레드가 매사에 "덤빌 테면 덤벼보라"고 반응하는 데는 전 남편 찰리의 영향도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나에게 단죄의 권리가 있는가?

 영화 <쓰리 빌보드>의 한 장면.

영화 <쓰리 빌보드>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 초반 밀드레드는 당신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갱단과 같은 무리라면 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영화 마지막, 또 다른 범죄자를 단죄하러 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영화는 범죄좌를 단죄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단죄를 위해 떠나는 이들의 눈빛에 이에 대한 확신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연대의 위로가 묻어있다.

추신.
무거운 주제의식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폭력과 시니컬한 유머에 잠식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운 영화였다. 이는 진작부터 각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마틴 맥도나 감독의 훌륭한 시나리오와 이 영화로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섬세하고 폭발적인 연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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