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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청룡부대는 중부 꽝남 지역을 주요 작전지역으로 삼습니다. 청룡부대 병력 5000명이 이 지역에 들어온 후 1968년 한 해에만 2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 당했습니다. 학살이 일어난 지 올해로 50년, 꽝남 지역에서는 합동 제사와 위령제가 연이어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지기는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마이TV>가 베트남 꽝남을 찾아 50주기를 맞는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 비극적인 이야기와 민간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죄와 화해를 위한 활동을 3차례에 걸처 보도합니다. 1편은 '하미마을 위령비, 연꽃 뒤에 가려진 진실'입니다. [편집자말]
[오마이TV] [씬 로이, 꽝남!] 1화 : 연꽃 뒤에 가려진 진실
ⓒ 조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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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와 위령제가 끝난 후 마을 주민들은 한국에서 온 강우일 주교(한베평화재단 이사장)에게 선물 하나를 건넸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액자였다. 50년 전의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달려와 사죄하고, 함께 위로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까. 그랬다. 하지만 단순한 감사만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건넨 액자에는 보다 복잡한 메시지가 담겼다.

지난 11일 오전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50주기 제사와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가 열린 곳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도) 디엔반현(군) 디엔즈엉사(읍) 하미마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베트남 여행지로 떠오른 다낭에서 자동차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희생자 135명, 50년 전의 참극

하미마을에서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8년 2월 22일(음력 1월 24일),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에 의해 주민 135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생존자들은 "학살이 일어난 다음 날 한국군이 마을에 불도저 2대를 몰고 다시 돌아와 시신이 묻힌 곳을 파헤치고, 시신 위로 불도저를 밀고 갔다"고 증언했다.

희생자 위령비는 그로부터 32년 후인 2000년 건립됐다. 앞면에는 희생자 135명의 이름과 출생연도가 적혀있는데 이름도 짓지 못한 1968년생 아기와 여성들의 이름이 이어진다.

위령비의 뒷면에는 비문이 있었다. 50년 전 학살의 참상과 생존자들의 한을 생생하게 묘사한 문장들이 촘촘히 박혔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모래와 뼈가 뒤섞이고 불타는 집 기둥에 시신이 엉겨 붙고 개미들이 불에 탄 살점에 몰려들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불태풍이 휘몰아친 것보다도 더 참혹했다."

참혹한 학살을 당했음에도 비문은 증오로 끝나지 않는다. 끔찍한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은 용서를 말했다.

"그 옛날의 전장은 이제 고통이 수그러들고 과거 우리에게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슬픔을 안긴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사과를 하였다. 그리하여 용서를 바탕으로 비석을 세우니 인의로써 고향의 발전과 협력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연꽃 대리석으로 은폐된 진실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위령비. 애초 한국군의 학살의 참혹함을 묘사하고 용서의 메시지를 담은 비문이 있었지만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현재는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가려진 상태다.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위령비. 애초 한국군의 학살의 참혹함을 묘사하고 용서의 메시지를 담은 비문이 있었지만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현재는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가려진 상태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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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위령비 뒷면에 이 비문은 없다. 연꽃 문양 대리석이 비문을 덮었다. 2000년 5월 준공을 앞두고 위령비 건축자금을 지원한 한국군 참전군인 단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비문 내용을 바꾸라고 요구했고, 한국 정부도 베트남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베트남 정부는 생존자와 유가족들에게 비문을 고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저항하던 주민들은 비문을 고치는 대신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가리는 쪽을 택했다. 비문을 수정해 진실을 왜곡하느니 차라리 비문을 가려 진실을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언젠가는 다시 비문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18년이 지난 올해도 응답받지 못했다. 50주기 위령제마저, 어둠 속으로 들어간 비문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치러졌다.

하미마을 주민들이 액자 선물을 준비한 건 이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건넨 액자에는 은폐를 강요당한 비문 내용이 담겨있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비문을 반드시 살리겠다'는 의지, '함께 하자'는 손 내밈이었다.

이번 50주기 위령제에 다녀온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전했다.

"그날 (주민들이) 제 손을 붙잡고도 간절하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 비문을 원상복구해 달라, 그것이 서로를 용서하고 보듬는 길의 시작'이라고. 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또 인정하는 것이 우리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이라고요."

손을 내민 주민들, 갚아야할 '마음의 빚'

문재인 대통령은 22일부터 2박 3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을 국빈 방문 중이다. 문 대통령은 23일 열린 한베 정상회담에서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과 만나 "(양국이) 모범적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불행한 역사"에 대해 문 대통령이 유감의 뜻을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사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래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불행한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갚아나가려면 최소한 가려진 비문만이라도 제자리를 찾아줘야 하는 것 아닐까.

(취재·제작: 이승훈 조민웅 기자 / 사진 제공: 한베평화재단·베트남평화의료연대)


태그:#베트남, #전쟁, #학살, #한국, #민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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