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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의 일이다. 동네에 작은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오전 시간에 책 대출과 반납을 처리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그 도서관 옆에는 초등학생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을 돕는 지역아동센터가 있었다. 지역아동센터와 도서관은 현관을 함께 사용했고 출입구만 달랐다. 어느 한 곳에서 마이크를 사용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면 다른 곳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방에 오는 오후가 되면 조용한 도서관에도 활기가 돌았다.

봄비가 내리던 3월이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오전 내내 도서관엔 사람이 없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공부방 앞에서 한 아이가 울고 서 있었다. 며칠 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여자 아이였다. 우산을 제대로 쓰지 못했는지 앞머리와 가방이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울고 있니?"
"문이 잠겼어요."

담당 교사에게 전화를 하니 점심을 먹으러 이제 막 나간 참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점심 급식을 먹고 공부방으로 오기 마련인데 그날 무슨 일인지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급식을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담당교사는 평소대로 문을 잠그고 식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나는 비밀번호를 눌러 아이와 공부방에 들어갔다.

이 아이의 점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가 주섬주섬 책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우리 둘은 같이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밥과 반찬을 야무지게 삼켰다.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을 뿐인데도 나는 아이에게 뭔가 대단한 일을 해주고 있는 양 뿌듯했다. 그 애가 너무나 맛있게 먹었기 때문일까. 자꾸 그 애가 싸온 반찬에 눈길이 갔다. 브로콜리를 강낭콩과 함께 걸쭉한 소스에 조린 것이었다. 색깔로 봐선 아마도 카레가루를 넣은 듯했다.

브로콜리 콩 카레조림
 브로콜리 콩 카레조림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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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소스와 브로콜리, 강낭콩은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었다. 어떤 맛일지 상상할수록 맛이 궁금했다. 하지만 반찬은 아이가 먹기에도 빠듯한 양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시래기를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 온 터라 아이와 나눠 먹을 반찬도 없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딱 한 개만 브로콜리를 먹어보기로 했다. "맛있게 먹네. 내가 좀 맛봐도 될까?" 아이는 아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콜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짭조름한 간장맛과 카레향이 브로콜리에 촉촉하게 배어 있었다. 브로콜리 특유의 씁쓸한 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브로콜리는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강낭콩 맛도 궁금했다. 아이의 반찬은 아무래도 밥에 비해 부족해 보였다. 어린 아이의 반찬을 자꾸 빼앗아 먹는 건 어른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안에 남은 카레향의 여운은 진했다. 이번엔 묻지도 않고 강낭콩을 집었다. 부드럽게 잘 익은 콩과 카레소스는 훌륭하게 어울렸다. 채소 반찬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 브로콜리 한 송이와 생 강낭콩, 카레가루를 사왔다. 브로콜리를 데쳐 건져 놓고 물에 간장, 카레가루, 올리고당을 섞어 우르르 끓이다가 생 강낭콩을 넣어 푹 익혔다. 콩이 완전히 익고 소스가 걸쭉해졌을 때 데친 브로콜리를 넣어 휘휘 섞었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뿌렸다.

낮에 먹은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새로운 레시피를 얻어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론 아이가 남긴 두어 숟가락의 밥이 자꾸 맘에 걸렸다.

브로콜리를 잘 먹던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중학생이 된 지 오래다. 사람의 식욕은, 아니 나의 식탐은 어디까지일까 가늠해보지만 새로운 레시피의 수만큼이나 멀리 뻗어나간 듯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넓고, 먹고 싶은 건 많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 반찬에는 손대지 말지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요리에세이, #단짠단짠 그림요리, #브로콜리, #채소반찬, #식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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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글쓰기 강의를 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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